“여름엔 게판, 겨울엔 새판”···‘새들의 정원’ 순천, 이야기를 품다

이윤정 기자 2024. 4. 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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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만 흑두루미. 순천시 제공

철새는 기가 막히게 안다. 자신이 머물 만한 땅을. 순천만은 철새들의 ‘원픽’을 받는 곳이다. 강물과 바닷물, 습지와 갯벌이 어우러진 이곳에서 철새 16만마리가 겨울 여행의 허기를 채우고 여독을 푼다. 순천만은 새들이 직접 보증하는 ‘친환경인증서’를 받은 셈이다.

순천은 ‘하늘에 순응한다’는 이름처럼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철새의 눈높이에 맞춰 자연을 가꾸자 사람이 찾아오는 도시가 됐다. 지난해 순천만국가정원에 1000만명이 방문하며 생태관광지로의 저력을 과시했다. 순천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젊은 세대가 머무르는 문화산업도시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생태를 보존하면서 콘텐츠를 키우는 전략을 내세웠다.

“여름엔 게판, 겨울엔 새판”
순천만 흑두루미. 순천시 제공

한반도 끝자락은 어디나 절경을 품었지만, 순천은 조금 더 특별하다. 염습지(갈대와 칠면초 등 염생식물 서식 갯벌)가 남아 있는 유일한 갯벌이 있어서다. 시가지를 관통하는 동천, 상사 조절지댐에서 이어지는 이사천, 신도심을 통과하는 해룡천이 순천 앞바다로 S자 물길을 내며 광대한 갯벌을 만들어낸다.

지난 1일 순천만국가정원 재개장에 맞춰 순천만 습지를 찾았다. 겨울 철새가 대부분 시베리아로 돌아간 시기임에도 노랑부리저어새와 흑두루미 가족 몇 마리가 모여 앉아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김경선 순천만습지생태해설사는 “이번 겨울 흑두루미 7000마리가 순천만을 찾았다가 지난달 러시아로 떠났다”며 “지금 21마리 마지막 팀이 남았다”고 설명했다.

순천만 습지를 드론으로 담았다. 갈대밭이 하트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다. 이윤정 기자

철새만 순천만에 기대 사는 것은 아니다. 어류 230종, 게 193종, 새우 74종, 조개 58종 등이 이 갯벌에 터전을 잡았다. 김 해설사는 “순천만에서는 다양한 생물을 만날 수 있다”면서 “1급 멸종위기종 수달이 새끼들을 훈련하러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여름엔 게판, 겨울엔 새판”이라고 덧붙였다. 고개를 숙여 갈대밭 사이를 보니 아이 손바닥만 한 작은 흙빛 생명체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갯벌 속으로 숨어들었다. 순천만 칠게였다.

다양한 생물이 서식한다는 것은 그만큼 영양염류가 풍부하고 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갯벌의 생산성은 육지에 비해 9배 정도나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갯벌의 생태적 가치는 1㏊(0.01㎢)당 9990달러로, 같은 면적 농경지 가치(92달러)의 100배 이상”이라고 평가했다.

순천 칠게

순천만 습지에 사는 동물들의 삶을 방해하지 않도록 사람의 동선은 최소화됐다. 멸종위기종 흑두루미를 위해 전봇대를 뽑았고, 왕복 4차선 아스팔트 도로는 잔딧길로 탈바꿈했다. 방문객은 갈대밭 위에 조성된 덱에서 습지를 만끽할 수 있다. 용산전망대에 서면 22.6㎢(약 690만평) 너른 갯벌과 5.4㎢(약 160만평)의 빽빽한 갈대밭이 한눈에 펼쳐진다. 소설가 김승옥이 새벽안개를 표현한 <무진기행>의 배경도 순천으로 알려져 있다. 푸른 물길, 흙빛 갯벌, 갈색 갈대가 어우러진 순천만은 마치 태곳적 지구가 생명을 틔우기 시작했을 때처럼 원시의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아날로그 정원에 디지털 콘텐츠 심는다
순천만국가정원 야경. 순천시 제공

순천만 습지가 동물을 위한 삶의 터전이라면, 순천만국가정원은 사람을 위한 쉼의 공간이다. 사실 순천만국가정원은 습지를 지키려는 노력에서 탄생했다. 순천만 습지가 명성을 얻으면서 2002년 연간 10만명이었던 관광객이 3년도 안 돼 300만명까지 증가했다. 늘어나는 차량과 탐방객으로 순천만의 생명이 위협받았다. 순천시는 전문가들과 연구를 진행해 순천만 입구를 도심 방향으로 옮기고 순천만으로 진입하는 차량을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순천만과 5.5㎞ 떨어진 도심 지역에는 거대한 정원이 들어섰다. 순천만국가정원은 습지 파괴를 최소화하고 도심 공간이 팽창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만든 에코벽인 셈이다.

순천만국가정원 봄 풍경. 순천시 제공

순천시는 이곳에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가꿨고, 2013년 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했다. 당시 방문객 440만명이 순천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2015년 순천만정원은 국가정원 1호로 지정됐다. 첫 박람회 이후 10년 만인 지난해 2023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고 약 1000만명이 순천을 찾았다. 하지만 순천의 고민은 계속됐다. 지방에 일자리가 없어 젊은이들이 수도권으로 향하는 현상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이에 순천시는 관람객이 잠시 머무는 정원도시를 넘어 젊은이가 살 만한 문화산업도시로의 변화를 선포했다.

동천 벚꽃. 이윤정 기자

지난해 박람회 이후 문을 닫고 6개월간 새 단장을 한 순천만국가정원에서 순천의 포부를 읽을 수 있었다. 우주시대를 맞아 ‘우주인도 놀러 오는 순천’이라는 주제를 정했다. 정원은 순천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동천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나뉘는데, 두 공간을 이어주는 ‘꿈의다리’는 우주선을 콘셉트로 조성했다. 다리 중간은 우주선이 내려앉은 모습을 연출해 ‘스페이스 브리지’로 꾸몄다. 물, 순천만, 우주가 어우러지는 미디어아트도 만날 수 있다.

‘K디즈니’ 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정원에 녹아들었다. 애니메이션, 웹툰 등 문화콘텐츠 산업을 순천에서 키우겠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노을정원과 키즈가든에는 자연주의 환경예술가 박봉기 작가의 작품이 설치됐다. 인기 애니메이션 <두다다쿵>의 캐릭터도 가미했다. 미로정원은 MZ세대를 겨냥한 ‘유미의 정원’으로 탈바꿈시켰다. 박람회 핵심 콘텐츠 중 하나였던 ‘시크릿 가든’은 체험형 실감 콘텐츠를 도입해 ‘시크릿 어드벤처’로 단장했다. 정원에서의 특별한 하룻밤을 선사했던 가든스테이 쉴랑게는 워케이션을 위한 공간이 됐다. 세계적 정원디자이너인 찰스 젱스가 설계한 순천호수정원과 이탈리아, 네덜란드, 튀르키예 등 다양한 국가의 정원도 만나볼 수 있다.

유미의 정원. 이윤정 기자

노관규 순천시장은 “국가정원은 아름답지만 젊은 세대엔 다소 지루하고 어르신들에게는 너무 넓다는 지적도 있었다”며 “순천의 자연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젊은이들이 일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콘텐츠를 더했다”고 설명했다. 재개장 개막식에 참석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2008년 순천을 방문했을 때, 갯벌을 보며 생태와 환경에 모든 것을 걸고 환경을 살리는 도시로 미래를 설계하겠다던 노관규 시장님 말씀이 기억난다”며 “다시 이곳에 오니 그때 생각한 것이 완수돼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순천 동천 전경. 이윤정 기자

순천의 꿈은 정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순천은 정부와 함께 애니메이션 클러스터 사업을 키우면서 관련 기업에 러브콜을 보내왔다. 노 시장은 “순천에서 국제적인 웹툰 어워드를 열 계획”이라며 “웹툰 종주국 한국의 명성을 순천에서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레드슈즈> <유미의 세포들> <퇴마록> 등 인기 3D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기업 로커스(LOCUS)가 본사를 순천으로 옮기는 등 기업들의 호응도 따르고 있다. 습지를 가꿔 철새를 품었던 것처럼 콘텐츠를 키워 젊은이들의 보금자리를 만들겠다는 순천의 꿈이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순천만 국가정원 항공사진. 순천시 제공
☞알고 가세요
순천역은 KTX가 지난다. KTX를 타면 서울에서 3시간 만에 순천에 닿는다. 순천역 바로 앞에 공유차를 빌릴 수 있는 쏘카존이 많다. 4시간 기준 중소형차 대여료가 1만~2만원대라 비용 부담도 적다.

순천만국가정원은 매우 넓다. 관람차에 탑승해 정원을 구경할 수 있다. 무인궤도차량인 스카이큐브를 이용하면 순천만국가정원 서원에 위치한 정원역과 순천만 습지의 순천만역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으로 순천만 습지와 순천만국가정원 각각 1만원이다. 비용이 부담 된다면 1만2000원인 순천시 관광지 통합입장권을 구매하는 게 좋다. 1박2일 동안 순천만국가정원, 순천만 습지, 낙안읍성, 드라마촬영장,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자연휴양림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갯벌을 품은 순천은 꼬막, 짱뚱어, 낙지가 유명하다. 순천의 다채로운 맛을 만나고 싶다면 한정식집이 좋은 선택이다. 홍어와 미나리를 곁들인 별미도 맛볼 수 있다.

순천|글·사진 |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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