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보던 파리의 출몰…美대령의 고백 "세균전, 합참에서 짰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밀고 밀리는 소모전을 펼칠 무렵인 1952년 초,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북한·중국의 주장이 거세졌다. 미국은 '그렇다면 유엔 조사단을 구성하자'고 맞섰다. 북한·중국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유엔이란 '미국의 작은 국무부'에 지나지 않고, 둘째, '유엔군'이란 이름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이는 당사자인 유엔이 '공정한 조사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국제적십자사(ICRC)가 조사에 나서는 게 어떠냐는 제안도 나왔다. 북한·중국은 "국제적십자사라는 게 실은 '스위스 적십자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손사래를 쳤다. "국제적십자사는 한반도에서 미국이 무차별 폭격으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내는 상황에 대해 아무런 논평이나 지적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세균전을 중립적으로 조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큰 몸집에 긴 날개, 못 보던 파리였다"
미국의 세균전 전쟁범죄 의혹을 밝혀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면서 모두 3개의 조사단이 꾸려졌다. △사실상 중국 정부가 만든 '미 제국주의 세균전 죄행조사단'(활동기간 1952년 3월15일~1952년 4월10일), △국제민주변호사협회가 만든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1952년 3월3일- 1952년 3월19일), △세계평화이사회 이름으로 만들어진 '국제과학위원단'(1952년 6월23일-1952년 8월31일)이다.
'미 제국주의 세균전 죄행조사단'은 중국이 정치적 선전 공세를 펼 목적으로 꾸렸다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 그렇기에 국제사회에서 눈길을 끌지 못했다. '국제민주변호사협회 위원단'을 꾸린 국제민주변호사협회는 1946년 프랑스 인권 변호사들이 중심이 돼 24개국의 법조인들이 모여 출범한 단체다. 따라서 이 협회의 조사위원단은 나름 공신력을 지녔다. 9명의 법학교수·변호사·판사(출신국은 영국·프랑스·네델란드·벨기에·이탈리아·오스트리아·브라질·중국)로 구성됐다.
9명의 위원은 1952년 3월3일부터 19일까지 북한에 머무르면서 현지 조사를 나갔다. 그들은 미군의 세균전 공격이 사실이라 못 박았다. 위원단은 조사 보고서 끝에 '미국 비행기들이 북한에다 전염병으로 감염된 곤충들을 투하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며 미국의 세균전 공세를 비난했다.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북한 당국이 '용의주도하고 철저한' 방역대책을 세워놓았기 때문이라 했다.
[위원단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과 지방 항공감시소의 보고에 따르면, 북조선 169개 지역에서 여러 가지 종류의 곤충들이 발견되었다. 그 대부분은 지금까지 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파리는 재래의 한국 파리와는 달리 몸집이 크고 긴 날개를 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곤충이 나올 수 없는 대단히 낮은 기온(1월 최고온도는 영상 1도)을 고려할 때 이런 곤충들이 나타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전문적인 조사결과는 다수 곤충이 병균에 감염돼 있음을 보여주었다](김주환편, <미국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 청사, 1989, 170쪽).
조사위원단이 지닌 한계는 법조인 중심으로 구성돼 세균전문가가 없었다는 점이다. 보름 동안 북한에 머물며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북한과 중국에서 주는 자료에 많이 기댔다. 전쟁 중이라 현장 조사를 제대로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보고서가 나오자 미국은 곧바로 세균전 의혹을 부인하고 나섰다. 위원단에 세균전문가들이 빠져 있기에 믿기 어렵고, 공산권의 선전에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ISC의 중심 인물, 조지프 니덤
정치적 선전 공세에 그치지 않고 전문가들이 나서서 그 나름의 의미 있는 결과물을 낸 것은 '국제과학위원단'(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ISC)이다. 위원단은 영국인 조지프 니덤(케임브리지대, 생화학), 소련인 주코프-베레즈니코프(소비에트 의학아카데미 교수, 세균학)을 비롯해 프랑스 동물생리학자, 이탈리아(2인) 해부학자와 미생물학자, 스웨덴 임상연구소장, 브라질 기생충학자 등 모두 7명의 과학자로 꾸려졌다(이 가운데 이탈리아 미생물학자는 정식 조사위원이 아닌 '옵저버').
소련인 주코프-베레즈니코프는 731부대의 세균전 범죄를 다룬 하바롭스크 전범재판(1949)의 조사관으로 활동했던 이력을 지녔다. 7명의 조사단 요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영국 생화학자 조지프 니덤(1900–1995)이었다. 1952년 조사단이 꾸려질 당시 니덤은 영국왕립학회 회원으로 전공인 생화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자였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세균전이 폈는가를 살펴보는 국제과학조사단에 니덤이 참여한 동기와 역할에 대해 쓴 김태우(한국외국어대, 한국현대사)교수는 니덤을 가리켜 '과학사와 중국학 분야에서 워낙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라 평가한다. 니덤은 30대 초반 <화학적 발생학>(Chemical Embryology, 1931,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1941년 '과학 분야에서는 노벨상 다음 가는 명예'라는 영국왕립학회 회원(FRS)이 됐다.
그게 끝이 아니다. 연구자로서의 삶 후반부엔 과학사 관련 역작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1954,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을 써냈다. 이 책은 중국에 대한 서구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거의 하룻밤 사이에, 그리고 거의 혼자 힘으로' 바꾸어 버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니덤은 나이 50대에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과학사 저서로, 그의 인생 전반부 업적 전체를 압도하는 놀라운 연구성과를 남겼다. 그런 업적을 인정받아 1971년 인문학계 최고 영예인 영국아카데미 회원(FBA)이 됐고, 1992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명예훈위'(Companions of Honour)까지 받았다. 이렇듯 니덤은 과학과 인문학 분야의 최고 영예를 얻게 되었는데, 20세기에 위의 세 가지 타이틀(FRS, FBA, CH)을 동시에 지닌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고 한다](김태우, '한국전쟁기 조지프 니덤의 세균전 국제과학조사단 참여동기와 주요역할'. <의사학> 제32권 제3호, 2023년 12월).
이렇게 니덤의 약력을 소개하는 까닭이 있다. (독자분들도 이미 짐작했겠지만) 문제의 세균전 의혹을 밝히려는 사람이 지녀야 할 과학적 엄밀성과 진지함이란 잣대로 보면, 니덤이 뛰어난 연구자였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1937년 케임브리지대로 유학 온 중국 여학생과 사랑에 빠지면서 니덤은 1942년부터 4년 동안 중국 충칭의 영국대사관 외교관으로 일했다. 그곳에서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가 중국군을 상대로 세균전을 편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ISC 보고서,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다"
니덤을 중심으로 한 국제과학위원단(ISC)은 1952년 7월9일부터 2주 동안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 조사활동을 벌였고, 이어 압록강을 건너 북한에서 8월6일까지 2주 동안 머물렀다. 북한에서 미군 공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8월31일 베이징 기자회견에서 '북한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대한 사실조사를 위한 국제과학위원단의 보고서'(ISC보고서)란 긴 이름으로 670쪽에 이르는 두툼한 결과물을 내놓았다.
니덤이 ISC의 중심인물이었기에 흔히 '니덤 보고서'로 일컬어지는 ISC보고서는 북한과 중국의 주장을 거의 대부분 사실로 받아들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보고서 앞부분에 미군의 세균전 의혹을 731부대와 관련시키는 대목이다. 미국의 세균전 능력이 731부대의 전쟁범죄자들로부터 얻은 '피 묻은 정보'와 떼려야 뗄 수 없음을 가리킨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생물무기, 특히 곤충무기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꿈을 지녔다. 그들은 만주에서 철수하기 전에 세균전과 관련이 있는 문서들을 조직적으로 없앴다. 1952년 초 북한·중국(만주)의 세균전 의혹이 제기되기 전에 이시이 시로가 한국을 2차례 방문했다는 언론 보도가 잇달아 나왔고, 3월에 다시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 내 점령당국(미국)이 이시이 시로의 활동을 도왔는지, 미군 극동사령부가 본질적으로 일본의 (세균전)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본 위원들이 줄곧 품었던 의문이었다](Report of the International Scientific Commission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Facts Concerning Bacterial Warfare in Korea and China, 1953, 12쪽).
731부대를 비롯한 '이시이 기관'의 우두머리 이시이 시로는 1952년 초에 한반도를 적어도 두 번 비밀리에 다녀갔다고 알려진다. 그가 방문했다는 시기는 '미국이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는 북한·중국의 주장이 거세지기 직전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이시이의 한반도 극비 방문을 확인해주는 미국의 문서는 없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미국이 인정한 바도 없다).
이시이가 미군 관계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한반도를 다녀간 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한 가지 추론을 해본다면 이렇다. 그가 다녀갔다는 1952년 초 무렵은 전선이 한반도 중부 지역을 경계선으로 지구전 양상을 보였다. 정전회담도 개점휴업 상태로 큰 변화가 없었다. 미국으로선 그런 상황에서 세균무기의 효능을 실험해볼 유혹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중국에서 악명을 떨쳤던 '원조(元祖) 세균전문가'가 한반도 전선을 돌아보고 뭔가 새로운 기획안을 내놓길 바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위원단이 내놓은 조사보고서 곳곳에는 이시이 시로의 망령을 떠올리는 서술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이 채택한 페스트와 관련된 세균전의 고전적인 방법은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을 컨테이너든 스프레이든 대량으로 배달하는 것이었다.···이 모든 사실과 다른 유사한 사실들에 비춰볼 때, 본 위원회는 한국에서 미 공군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군이 썼던 방식과 똑 같거나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페스트를 북한에 퍼뜨렸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ISC보고서, 24-25쪽).
'니덤 보고서'가 지닌 한계
ISC보고서('니덤 보고서')는 한반도에서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있고, 그 원인은 비행기에서 세균을 떨어뜨리는 미국의 '항공 활동'에 있음을 세계가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위원단이 전쟁지역에까지 가서 조사활동을 편 목적은 미국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본 위원회는 사망한 한국 민간인의 숫자, 총 질병률 및 사망률에 관한 구체적인 수치를 세계에 제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위원회가 확인한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전염병이 발생했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 길(원인)을 거슬러보면 언제나 미국의 항공 활동으로 돌아간다(the trail always leads back to American air activity). 세계는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경고를 받아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위험과 함께 이런 종류의 전쟁(세균전쟁) 가능성을 알고 있어야 한다](ISC보고서, 59쪽).
미국은 ISC보고서를 가리켜 '수집된 곤충 표본을 갖고 세균이 묻었다고 하는 공산권의 거짓 선전활동'에 과학자들이 속았다고 했다. 아울러 그들이 낸 보고서는 허점투성이이라 깎아내렸다. 하지만 니덤을 비롯해 조사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서구의 과학자들이 곤충 표본 수집가들에게 속을 수 있겠는가" 하고 반박했다. '인터뷰와 조사를 벌인 목격자 수백 명의 증언들이 의심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서로 너무 일치하며 너무 독립적'이라는 것이었다.
ISC는 미군이 세균에 오염된 곤충을 살포하기 위해 썼다는 폭탄 모양을 한 빈 통, 세균 매개 곤충의 샘플, 그리고 세균에 감염돼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들의 증언을 확보했다. 하지만 조사단은 몇 가지 한계도 지녔다. 무엇보다 북한·중국이 제공하는 자료에 많이 기댔다. 미군 비행기의 공습 순간에 ISC 요원이 바로 그 곳에 머물다가 갓 떨어진 세균무기와 그 속에서 꿈틀대는 곤충들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바람직하겠지만,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지 못했다.
노벨상 수상자, "나는 회의론자였지만 생각 바꾸었다"
그럼에도 ISC보고서는 세균전 연구자들 사이에 후한 평가를 받는다.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이 사실이라 여기는 대표적 연구자인 스티븐 엔디콧, 에드워드 해거먼이 그러하다. 이들은 둘 다 캐나다 토론토 요크대학 교수 출신으로 동아시아역사학 전공자들이다. 특히 엔디콧은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고 1980년대에 중국 쓰촨(四川)에서 대학교수를 지낸 중국통이다.
이 두 연구자는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The United States and the Biological Warfare, 1998)이란 문제작을 써냈다. 이 책은 위에서 살펴본 ISC보고서(이른바 '니덤 보고서')를 비롯해 미국의 여러 문서보관소의 관련 문서들을 뒤져 얻어낸 여러 정황 증거들을 분석하면서, 미국의 세균전 '설'이 단순히 의혹이 아니라 사실이라 주장했다. ISC보고서에 대한 이 두 연구자의 평가를 보자.
[이 ISC가 비록 중국 혁명에 우호적인 사람들로 구성됐다고 하지만, 단 한 명만 소련 출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서구에서 훌륭한 경력과 명성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들이 낸 보고서는 미군의 활동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비춰볼 때 더욱 존경스럽게 취급돼야 한다. 거기엔 단 하나의 결론만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 동안 곤충과 다른 매개물을 이용해 생물학전(세균전)을 실험했다는 북한과 중국의 설득력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게 재창조했다](엔디콧&해거먼,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중심, 2003, 286쪽).
ISC보고서는 '설마 미국이 세균전을 폈겠느냐'며 공산권의 주장에 의문을 품었던 많은 회의론자들의 생각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1967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던 조지 월드(하버드대 생물학연구소장)는 엔디콧과 해거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처음엔 우리가(미국이) 한국에서 세균전을 벌였다는 생각을 전면 거부했다. 니덤이 공산주의에 편향됐다고 믿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한다. 니덤은 훌륭하고 대단히 신중한 사람이며 기념비적인 학자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펼쳤다는 주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당혹스럽고 수치스런 마음으로 당시 내가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매우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엔디콧&해거먼, 291쪽).
"세균전 계획, 1951년 합참에서 짰다"
ISC의 활동 가운데는 포로로 잡힌 존 퀸 중위를 비롯한 미군 비행사 4명과의 면담도 있었다. 4명 모두 미 공군 중위였던 포로들은 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료를 마시며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서너 시간씩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ISC조사단에게 '세균전을 펼쳤다'고 털어놓았다. 이들의 진술에 따르면, '옳지 못한 것은 알았지만 군인이라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 했다. 자료사진들을 보면, 포로가 밝게 웃는 모습도 보인다(이들은 포로교환으로 풀려난 뒤 진술을 뒤집고 '세균전 따윈 없었다'고 주장했다).
공산권에선 미 공군 포로들이 남긴 자술서를 세균전 증거로 내세웠다. 자백 또는 증언 형식으로 자술서를 내놓은 공군 포로는 모두 36명이었다. 이 가운데 계급이 가장 높은 이는 프랭크 슈와블 대령(미 제1해병 항공비행단장)이었다. 1952년 7월 격추돼 포로가 된 그는 공산측 방송에도 나와 마이크 앞에서 그가 관련된 세균전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의 자술서엔 하급장교라면 알기 어려웠을 고급정보가 보인다.
[한국전쟁에 있어서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 합동참모본부에서 이뤄졌다. 참모본부는 극동군총사령관(당시 리지웨이 대장)에 의해 소규모 실험적 단계로 시작되었던 세균전 규모를 한반도(북한) 전체로 확대하도록 건의했다. ···이들 지역은 최소 10일 간격으로 재오염시킬 예정이었다. 작전은 콜레라 폭탄을 사용해 6월 첫 주에 개시됐다. 그 뒤 황열병, 티푸스에 의한 오염작전이 계획되고 있었다](데이비드 콩드, <한국전쟁 또 하나의 시각> 2, 과학과사상, 1988, 360-361쪽).
슈와블 대령의 자술서 내용을 책에 옮긴 미 역사학자 데이비드 콩드는 1946년부터 연합군총사령부(GHQ)의 문관으로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었다. 맥아더 장군이 전범 우두머리인 히로히토 일왕과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 '악마의 의사'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미국의 일본점령정책에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품게 됐다. 1947년 GHQ를 떠난 그는 패전 뒤 미 군정 아래의 일본, 좌우 갈등과 전쟁의 격동기를 맞았던 한국 등 동아시아 정치사를 비판적으로 다룬 책을 여러 권 남겼다.
슈와블 대령이 '일반 세균전 계획은 1951년 10월 합동참모본부에서 이뤄졌다'고 밝힌 내용은 포로가 된 앤드류 에반스 대령의 입에서도 확인된다. 미 전쟁기획국 출신인 에반스 대령은 1953년 중국 인민지원군의 대공포에 격추돼 붙잡혔다. 그는 '한반도에서의 생물학전(세균전)은 참모본부가 인편으로 리지웨이 장군에게 관련 명령을 전해 착수됐다'고 털어놓았다. 슈와블 대령과 에반스 대령이 리지웨이 장군에게 세균전 관련 대면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엔디콧&해거먼, 194쪽 참조).
세균폭탄 떨어뜨린 조종사, "명령은 명령"
1952년 4월에서 7월 사이에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들도 한반도에서 미국이 세균전을 펼쳤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들의 말을 모아보면, 세균폭탄을 일본에서 가져왔고, 공식 보고로 세균탄을 가리킬 때는 '불발탄'이라 불렀고, 비행사와 탑승원 사이에서도 '세균탄'을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비밀을 지킨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고, 이를 어길 경우 군법회의에 넘겨질 것이라 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콩드의 글을 다시 보자.
[세균전에 종사하는 비행사의 사기는 대단히 낮았다. 그들은 기지로 돌아오면 네이팜과 세균 투하의 임무를 잊으려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것은 무자비한 군대의 명령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명령은 명령이다!"](데이비드 콩드, 363쪽).
위 문장 끝에서 '명령은 명령'이란 표현은 세균전에 투입된 미군 조종사들뿐 아니라 군인이라면 지켜야 할 일반적 의무로 여겨진다. ISC보고서('니덤 보고서')에 실린 미군 조종사의 자술서에도 그런 내용이 보인다. 존 퀸 중위의 자술서에 나오는 한 대목.
[우리가 비행기를 타러 갔을 때 경비병을 만났다. (비행기 날개 쪽에 있는 폭탄이) 세균 폭탄(germ bombs)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경비병은 날개 폭탄들은 잘 관리(포장)돼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비행기를 점검할 때 항법사가 "비행기 날개폭탄에 어떤 병균도 없다"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고, 나는 "명령은 명령이니..."라고 말했다](ISC 보고서, 614쪽).
정전협정(1953년 7월27일) 뒤 포로교환으로 풀려나 미국에 돌아가면서 존 퀸 중위를 비롯한 포로들은 진술을 뒤집었다. 세균전 자백은 '강요'에 따른 것이라며 '세균 살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한국전쟁 기간 중에 펼쳐졌다는 세균전 의혹은 (한쪽에선 '사실'이라 주장하지만) 당사국인 미국이 '사실이 아니다'라고 손사래를 침으로써 논란으로 남았다.
다음 글에서는 세균전이 실제로 있었다고 여기는 캐나다 요크대학의 스티븐 엔디콧, 에드워드 해거먼 교수의 주장과, '세균전은 없었고 공산권의 선전이었다'는 밀튼 라이텐버그(메릴랜드대 국제안보연구센터 선임연구원)의 반론을 중심으로, 미국의 한반도 세균전 의혹을 더 살펴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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