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우리 아이와 똑같이 그렸어요?’ 이탈리아서도 일본서도 묻더군요”
‘아동문학 노벨상’ 안데르센상, 한국인 첫 수상자
“여기저기 저를 원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져서 행복하면서 힘들죠. 근데 저도 재미있는 게, 이탈리아 독자를 만나면 ‘파도야 놀자’의 주인공이 이탈리아 아이라고 생각하고, 일본 독자를 만나면 일본 아이라고 생각해요. 진심으로요. 다들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제게 ‘어떻게 저희 아이와 이렇게 똑같이 그리셨어요?’ 하고 물어요, 하하.”
2022년 한국인 최초로 ‘아동문학 노벨상’으로 불리는 세계 최고 권위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을 받은 뒤 변화를 묻자, 이수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 작가가 첫 에세이집 ‘만질 수 있는 생각’(비룡소)을 펴낸 뒤 마련된 간담회 자리.
미국에서 먼저 출간돼 국내로 역수입된 ‘파도야 놀자’는 이수지 작가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다. 텍스트 없이 오로지 이미지의 힘으로 서사를 빚어내는 이수지 특유의 ‘글 없는 그림책’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품. 이 작가는 “우리 마음 속의 공통된 부분을 건드리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는 게 ‘글 없는 그림책’인데, ‘파도야 놀자’는 14개국에서 제목만 번역돼 출간됐다. 사는 곳이, 언어가 달라도 우리는 보편적 존재구나 생각하게 된다”고도 했다. 이 작가의 책들은 한국 그림책이 세계로 나가기 위해 꼭 한국 전통 양식의 그림이나 옛 이야기를 활용해야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우리 그림책도 세계적 보편성을 지니고 더 폭넓게 다양한 독자를 만날 수 있는 때에 다다랐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는 책으로 말한다는데 굳이 책 만드는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이유는 뭘까. 이 작가는 “그림책이 멋진 건 독자를 파고드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림책을 둘러싼 세계도 재밌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블로그 사이트에 작업 일상과 감상 같은 걸 업로드해왔는데, 그 사이트가 문을 닫는다는 거예요. 아, 디지털 세계라는 게 생각보다 취약하구나, 어느 순간 깡그리 사라져버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그림책은 아이들이 손으로 넘기면서 봐야 이야기가 진행되는 명확한 아날로그의 세계죠. 누군가 문 닫으면 사라지는 디지털 세계가 아닌 물리적 실체가 있는 아날로그의 세계에 나의 생각도 붙잡아 책에 묶어두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작가의 상황과 환경, 맥락에서 나오는 그때 그때의 작업, 그 이야기가 독자에게 전해진다면 그림책의 세계도 더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책은 4부로 나눠, 초창기 작업 노트부터 엄마가 되어 아이들과 씨름하며 보냈던 순간들, 외국 편집자와 일했던 일화, 안데르센상 수상 연설문 등 이 작가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풍성한 내용을 채웠다.
“그림책은 쪽수는 적지만 그 안에 엄청나게 큰 세계가 들어있죠. 표지를 보고, 넘겨서 면지를 보고, 그림을 읽고, 페이지를 넘겨 끝까지 가는 게 그림책입니다. 소설가는 책을 쓸 때 판형과 지질, 촉감을 생각하지 않지만 그림책 작가는 처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든 걸 생각하며 작업하는 특이한 아티스트예요. 저는 그 모든 과정이 흥미롭고, 제가 재밌는 걸 저 혼자만 재밌을 수는 없기 때문에 여러분과 나누려고 에세이를 썼습니다.”
책의 물성(物性)을 끊임없이 탐구해 온 작가의 이야기답게, 초판본은 제본 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누드 제본 형식의 독특한 책으로 만들어졌다. “보통의 책은 지저분하다고 생각해서 표지를 한 번 더 감싸서 감추지만, 저는 그 실 제본을 그대로 드러내서 ‘책이란 건 이렇게 실로 꿰매서 묶는 것’이란 걸 보여주려 했습니다. 저희 집 아이가 책등을 펴서 들고 있는데 ‘아, 정말 예쁘다’ 생각했어요. 책은, 이렇게 손에 들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잖아요.” 이작가는 직접 책등을 펼쳐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민중미술 유행의 끝자락, 추상과 구상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격변의 시대”였다. 영국 캠버웰대에서 ‘북 아트’(Book Arts)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작가는 책 속에 이렇게 썼다. “글 없는 그림책의 세계로 들어섰을 때, 나는 변칙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 같다. 책의 물성과 매체성에 탐닉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말없는 그림책이 내게 말없이 말 걸어오는 내밀한 세계. 이것은 완전히 다른 언어이며, 이것이 바로 나의 언어구나. 내 안의 이야기를 표현할 목소리를 갖게 되던 순간. 진심으로 기뻤던 것 같다.”
아이들도 모두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는 시대. 종이책 읽는 모습은 갈수록 희귀해진다. 작가는 “나는 그림책 읽어주는 사람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오늘 너에게 이걸 가르치겠어’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이 책이 좋아’, ‘이 책은 정말 멋있어’, ‘너랑 같이 이걸 느끼는 게 좋아’ 하는 마음이 필요해요. 책을 같이 읽는 어른의 태도가 아이에겐 절반 이상입니다. 그림책을 잘 모르는 어른이어도 아이들이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봤으면 하는 진심을 가졌으면 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책이 얼마나 즐거운 세계인지 안다면, 휴대전화와 디지털 매체의 홍수에 휩쓸리거나 잡아먹히지 않게 될 겁니다.”
해외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 작가 중 한 명. 이 작가는 “저는 약간 ‘이 김에’ ‘한 김에’가 있다”고도 했다. “영국 유학 때 이탈리아 볼로냐 도서전에 놀러 가는 김에 런던의 셰어하우스 벽난로에 혼자 무대를 꾸미고 그림을 그려 사진을 찍고 만들어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책 가제본을 들고 갔죠. 그 책이 이탈리아 출판사에서 먼저 출판됐어요. 모든 시작은 하나의 사건이죠. 결국 우연이 계속 쌓여 사람이 일을 만듭니다. 그런 경험이 한 번 두 번 쌓이다 보면 굉장히 스스로 적극적이 됩니다. 이 세계를 재미있어 하는 마음이 열리는 거죠. 그림책 출판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다정다감하기도 하고요. 후배 작가들도 그냥 하던 대로 즐겁게 잘 하되, 기회가 된다면 자신의 책을 외국에 가지고 나가 보시면 좋겠어요. 두려울 게 뭐 있나요, 부딪쳐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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