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외 없는 온난화…마냥 반가울 수 없는 ‘남극의 꽃’
식물 수업
남극좀새풀 등 현화식물 급증
물개 줄고 광합성 용이해진 탓
땅이 입는 옷 ‘지의류’ 가장 흔해
검고 노란 우스네아, 세련된 자태
나는 매우 엄숙하게 가위를 들고 이끼 카펫을 밟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과학자들을 따라갔다. 그냥 육안으로 상태를 살피는 식물도 있었고 온습도 측정기를 설치해 성장 환경을 매시간 기록하는 식물도 있었다.
“작가님, 여기 잘라주세요!”
과학자들이 장치를 다 설치하고 부르면 1㎜의 여분도 남지 않게 꼼꼼히 잘랐다. 자르는 일만큼이나 남은 케이블 타이를 챙기는 것도 중요했다. 원래 없었던 것은 앞으로도 없게 하는 것이 남극의 기본 규칙이었다. 무심코 버린 플라스틱 조각이 이 백지 같은 대륙에 어떤 도미노를 불러올지 모르니까. 엘(L) 박사는 이동하면서도 쓰레기를 주웠고 나도 곧 따라했다. 일종의 남극 ‘플로깅’이었다.
가위질은 무척 중요했지만 사실상 대기 시간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곧 꽤 많은 것들을 주웠다. 각양각색의 비닐, 작은 플라스틱 조각, 나무판자, 녹슨 못, 에이치(H)빔 자재, 피브이시(PVC)관. 작은 도랑에서 라면 수프 비닐도 건져 올렸다. 주황색 포장지에 ‘영라면’이라고 매우 복고적인 글씨가 쓰여 있었다. 나도 ‘한 라면’ 하는 사람인데 내가 모르는 라면도 있나 하면서 수거했다.
건축자재 조각들은 지난겨울 기지를 강타한 엄청난 블리자드의 흔적이라고 했다. 창고 중 하나가 뜯겨나간 것이었다. 블리자드는 눈보라를 동반하는 강풍으로 남극에서는 평균 풍속 160㎞/h의 블리자드가 흔하게 찾아온다. 남극을 여러번 경험한 과학자는 “내 손조차 안 보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라고 내게 설명했다. 색과 그림자가 소멸되고 얼음 결정과 눈이 빛을 산란시키며 지평선을 비롯한 모든 실루엣이 사라지는 순간, 운동감각을 잃어 그 자리에 붙박이게 된다고. 그런 흰빛의 포섭은 상상으로밖에 느낄 수 없었지만(여름의 세종기지에는 블리자드가 없으니까) 그 위력만은 파괴된 창고 벽을 보며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주에서 4주 생존 기록
“남극좀새풀, 우스네아, 솔이끼, 클라도니아, 히만토르미아….”
엘 박사는 들판을 걸어가며 수업을 계속했다. 모두 기억하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내가 제일 못 하는 것이 이름 외우기였다. 남극의 작은 돌멩이 위에 발을 얹어놓고 맥스웰만의 잔물결을 바라보며 식물 수업을 들을 때도 그랬다. 겨울이면 지표면에서 2m 높이로까지 쌓이는 눈을 이겨내고 여름을 맞은 식물들의 이름이 신비하게 들리면서도, 돌아서니 기억을 못 했다. 그런데 몇걸음 가다 엘 박사가 “작가님, 이것 이름이 뭐랬죠?” 하고 기습적으로 물었다.
“솔이끼요.”
처음에는 다행히 맞혔다.
“오, 기억하시네요. 이거는요?”
“안…드레아던가?”
엘 박사는 히만토르미아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이제는 정말 외울 수 있다는 듯이 “아, 히만토르미아구나”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드레드록스 머리(흔히 말하는 레게 머리)처럼 굵고 구불구불한 모양의 히만토르미아는 바턴반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개체로 지의류(地衣類)에 속했다. 지의류는 단일 생명체가 아니라 균류와 미세조류가 함께 살고 있는 ‘공생체’다. 지의류라는 말에 이미‘땅의 옷’이라는 한자가 들어 있듯이 극지나 사막 같은 극한 지역은 물론이고 우주 공간에서도 자기 존재를 펼쳐놓는다고 한다. 무려 4주 동안이나 우주에서 산 기록이 있다.
내가 남극에 도착해서 홀려버린 존재도 지의류의 하나인 우스네아였다. 가느다란 수염뿌리 같은 모래색 몸체에 안테나 접시처럼 생긴 검정 포자낭을 가지고 있는 우스네아는 내가 여태껏 본 적 없는 극단의 세련됨을 가지고 있었다. 몸을 숙여 바라보고 있으면 나를 어딘가 먼 곳(물론 남극은 이미 먼 곳이지만)으로 데려다 놓는 것 같았다. 너는 다르고 특별하구나. 집에서도 종종 식물들과 대화해 가족들을 걱정시키던 나는 여기서도 그렇게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남극의 빙벽과 유빙의 흰빛뿐 아니라 우스네아의 검고 노란빛을 남극 고유색으로 기억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직접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감동을 이 작은 생명체를 통해 받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작가님, 이게 뭐라고 했지요?”
엘 박사가 얼마쯤 가다가 다시 확인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엠(M) 박사가 남극좀새풀을 맞혔다. 엠과 나는 둘 다 엘 박사에게 식물 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당연하게도 엠이 훨씬 이름을 잘 외웠다. 극지 식물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른다고 하더니 초능력을 가진 영화 속 외계생명체 스피시즈급으로 정보량을 쌓아갔다.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남극좀새풀은 여름의 환한 손길에도 살아나지 못하고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잎이 모두 말라 있었다. 남극에는 지의류와 이끼가 대부분이지만 현화식물, 그러니까 꽃이 피는 식물이 2종 살고 있다. 남극좀새풀과 남극개미자리로, 남극좀새풀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잔디처럼 생겼고 남극개미자리는 수백개의 작은 돌기가 돋은 듯한, 브로콜리를 떠올리게 하는 모양이었다. 이 두 종류의 식물은 현재 남극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데, 지구온난화와 물개의 감소가 원인이라고 한다. 물개들에게 덜 짓밟히고 광합성량은 늘어나 생존이 유리해진 것이다.
“온난화 꺾였어요?” 질문·낙담의 반복
온난화는 이제 남극과 완전히 결합된 단어처럼 느껴졌다. 그 변화가 얼마나 빠르고 극적으로 진행되는가에 대해 식탁에서조차 과학자들은 일상적으로 이야기했다. 나는 현재 온난화 상황에 대한 남극개미자리만큼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어 대화에 몰두했는데, 어디선가 “그래도 약간은 꺾였죠?” 하고 누군가가 말하면 “정말요? 약간은 그래도 나아졌어요?” 하고 애타게 물었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그런 데이터가 사실은 코로나 상황으로 인한 일시적인 것이거나 으레 주기를 가지게 되어 있는 자연적 현상일 수 있다며 신중해졌고 나는 약간 낙담했다.
가장 귀를 쫑긋 세운 건 앞으로 집을 사려거든,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과연 물에 잠길 지역인가를 확인하라는 조언이었다. 집을 구입하면서 역세권인가 숲세권인가도 아니고 침세권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니.
“지금은 온난화가 먼일처럼 느껴지겠지만 한번 가시화되면 집값에 미치는 영향은 순식간일 거예요. 바로 몇년 후일 수도 있어요.”
한 과학자가 말했다. 그런 입지 조건으로 그가 선택한 지역은 내가 사는 곳에서 자동차로 1시간 떨어진 도시였다.
엘 박사는 그래도 저번에 왔을 때보다 눈이 덜 녹은 느낌이라고 케이지엘(KGL)9 부근을 돌아보며 회상했다. 예상보다 눈 쌓인 곳이 없어서 지인들에게 유빙 앞 ‘설정샷’을 찍어 보내고 있는데 이것이 전보다는 남극다운 풍경이라니. 나는 자갈로 뒤덮여 있는 산과 노두(지층이 지표에 드러난 부분)를 둘러보며 걱정했고 그래도 이 여름이 좋다는 듯 물기를 품은 이끼들은 반짝였다.
기지로 돌아와 주워온 쓰레기를 버리고 운송 박스를 확인하러 갔다. 벡터의 짐들이었는데 어느 박스를 열어도 과자와 탄산음료, 컵라면 등이 나왔다.
“아니, 여기도 과자가 있는데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그사이 친해진 나는 작은 매점을 차려도 될 만큼 쌓여 있는 과자들을 보면서 소리쳤다. 라면도 종류별로 도착해 있었다.
“꼬북칩은 없잖아.” 벡터가 항변했다. 물론 꼬북칩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새우깡이 없으면 괴로워지는 나처럼. 초코송이를 뜯자 초콜릿크림 부분이 곰팡이가 핀 것처럼 허옇게 변해 있었다.
“상한 거 아닌가요?” 나는 과자를 들고 살피며 물었다.
“아니에요, 적도를 건너와서 그래요.”
엘 박사가 설명해주었다. 선박을 타고 몇달씩 걸려 오다 보니 초콜릿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은 것이었다. 사실 기지 식품들도 ‘소비 기한’ 안에 든 것들은 드물었다. 그런 빠른 유통은 한국에서나 가능했고 한달 정도 지나 있어도 신선한 편이군, 하며 먹는 게 기지생활법이었다. 문제가 생긴 경우는 물론 없었다. 여기는 바이러스마저 숨을 죽이는 남극이니까.
숙소로 올라가 보니 복도 끝에 못 보던 여자 대원이 서 있었다. 꽤 먼 거리라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긴 머리를 풀어헤쳐 손으로 털더니 다시 질끈 묶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오늘 비행기로 들어온 멤버 같았다. 우선은 화장실 청소할 멤버가 하나 늘었다는 생각에 반가웠다. 기지에서는 목요일 5시에 대청소를 실시하는데 나를 포함한 세명이 전체 여자 화장실과 샤워실을 도맡고 있었다. 한명이라도 늘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나는 그가 긴 머리를 히피 스타일로 기르고 아주 빠르고 스왜그 있는 손짓으로 식전기도를 하는, 에어로졸 연구자 안드레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돌이 되지 않은 딸을 한국에 두고 온 아기 아빠라는 것도. 잠시 청소 파트너로 생각하고 반겼던 것이 혼자 민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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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지에서 상상한 색다른 라면
저녁을 먹는 시간은 각자 오늘 무엇을 했는지 정보를 나누는 시간이기도 했다. 남극이 오늘 뭘 보여주었고 뭘 방해했는지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지구의 미래는 온통 그들이 관심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존재에 의해 운용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었다. 대기과학자와 이야기하고 있으면 산소와 탄소가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 같고 해양생물학자와 이야기하면 지구의 진정한 주재자는 원생동물(단세포로 구성된 원시적 동물)과 동식물 플랑크톤 같았다. 그날의 대화는 흐르고 흘러 인공지능(AI)을 논문 작성이나 연구에 얼마나 응용하는가로 넘어갔다. 예전에는 식물 사진을 하나하나 보며 연관성을 찾아내고 수식 과정을 거쳐 모델링을 했지만 에이아이에게 ‘경험’하게 하면 더 빠르게 예상을 도출하고 모델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기계한테 그런 능력을 가르치면 위험하지 않아요?”
거의 19세기 러다이트 운동급의 기계 불신론자인 나는 그렇게 질문했다. 이미 스마트폰을 쓴다는 사실 자체가 데이터 제공자로 이용되는 것이지만 적어도 인공지능 챗봇을 쓰는 데만은 신중하고 있었다. 변화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한 늦추고 싶었다.
“나는 그냥 하던 방식이 좋아. 에이아이는 별로야.”
홍 선생이 의견을 보탰다. 자기 눈과 발과 머리를 믿는 지금의 연구 방식을 고수하고 싶은 듯했다.
“선생님은 어디서 성장하셨어요?”
“저는 완전 시골에서 자랐어요.”
그러자 여느 과학자들과 다른 면모가 이해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내가 코펠로 착각하기도 한 둥근 이동의자를 배낭에 걸고 다니며 홍 선생은 늘 기지 밖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목적한 곳에 도착하면 의자를 엉덩이에 아예 걸고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녔는데, 그 모습은 땅을 관찰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지는’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 실제로 농촌에서 고추 같은 작물을 딸 때 할머니들이 쓰는 의자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홀릴 것 같은 입담을 이용해 자기가 최근 눈여겨보고 있는 히만토르미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눈에는 그냥 시커멓게만 보였던 그 지의류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체마다 생김새가 완전히 다르다고. 자기는 그렇게 대조적으로 자라는 이유가 너무 궁금하다고. 사람들이 그 이유가 뭐 그렇게 특별할까요, 하며 히만토르미아의 다른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자 홍 선생은 “나는 걔가 궁금해!” 하며 눈빛을 이글거렸다. 그러자 나 역시 그 문제가 이번 시즌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처럼 느껴졌다.
“이런 이유들을 알아서 뭘 할 수 있을까요?” 저녁 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돌아가는데 누군가 물었다. 기초과학 연구자들이나 작가들이나 목적과 효용성의 잣대를 들이대면 할 말이 없어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뭐 그런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이를테면 우스네아로 만든 남극 라면!”
“다시마 넣어주는 라면처럼 우스네아를 하나씩 넣어주면서?” 엠 박사가 금세 응용해 상상을 보탰다.
“그렇죠! 대박일걸?”
우스네아를 정성스럽게 물어 자기 둥지를 만드는 스쿠아가 들으면 당장 부리로 쪼아버릴 일이겠지만 그날 저녁 우리는 신제품 개발을 통해 사람들에게 남극의 맛을 알려주자며 의욕을 불태웠다. 물론 라면은 안 되겠지만 생각해보면 라면만이 줄 수 있는 그날 저녁의 열의였다.
글·사진 김금희 소설가
단편집 ‘너무 한낮의 연애’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 에세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식물적 낙관’ 등을 썼다. 작고 단순하고 환해지기 위해 늘 분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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