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0년 전 바가지 씌운 술집 주인 물속에 던졌다
직장인에게 가장 자주 가는 장소를 2곳 꼽으라고 하면 회사와 술집을 말하는 이가 적잖을 것이다. 예부터 술집은 만남의 장이고, 때로는 화합을 위해 만났다가 다투기도 하는 곳이다. 술집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그렇다면 최초 술집은 언제, 어디서 시작됐을까.
최초 술집에 대한 기록은 '함무라비법전'에 등장한다. 물론 '길가메시 서사시'가 함무라비법전보다 먼저 쓰였고, 여기에 최초 주모인 시두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시두리가 지낸 곳은 술집이라기보다 숙박이 이뤄지는 주막 혹은 여인숙에 가깝다. 반면 기원전 18세기에 기록된 함무라비법전에는 술집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등장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재미있는 점은 기원전 18세기에 쓰인 함무라비법전에 술 외상값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는 사실이다. 가령 111조는 "만약 주막 여주인이 60카(1카=약 120L)를 제공한 경우 그는 50카의 곡식을 대금으로 받을 수 있다"고 명시해놓았다. 곡식을 기준으로 술 외상값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정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술집에서 과도한 술값을 요구하면 어떻게 될까. 함무라비법전은 108조에서 이에 대한 답을 준다. 술값으로 과도한 은을 요구하거나, 술의 되를 작게 만들어 손님을 속인 경우 물속에 던져버리게 한 것이다. 이 밖에도 고대에는 종교인의 술집 방문을 철저히 금했다. 함무라비법전 110조는 여사제(종교인)가 술집을 열거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 화형에 처한다고 했다.
함무라비법전에서 말하는 술은 맥주 계열의 주류로 보인다. 바빌로니아에서는 와인보다 곡주가 발달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나면서 퇴적물이 쌓였고, 이 비옥한 토지에서 보리와 밀이 잘 자랐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0년 무렵 수메르 유적지에서 출토된 점토판에는 맥아를 빻아 빵을 만들고, 여기에 물을 부어 반죽한 뒤 발효시켜 맥주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최초 맥주는 빵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맥주를 '액체빵(liquid bread)'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대에도 이어지는 빵 맥주
크바스의 '한국 버전'이 맥콜과 보리텐 같은 보리탄산음료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빵으로 맥주를 만드는 방식은 한국 막걸리 문화와 유사하다. 우리가 남는 밥으로 막걸리를 만들었다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는 남는 빵으로 빵 맥주를 만들었다.
다시 함무라비법전 얘기로 돌아가보자. 함무라비법전은 최초 성문법으로 알려졌지만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함무라비법전보다 3세기 빠른 기원전 21세기 우르 제3왕조 때 제정된 '우르남무법전'이 1951년 발굴됐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 함무라비법전은 완전한 형태로 남겨진 세계에서 4번째로 오래된 법전이다. 함무라비법전은 돌기둥에 기록돼 바빌론의 마르두크 신전에 놓여 있었다. 1901년 높이 2.25m 돌기둥에 적힌 이 법전은 프랑스 고고학자에 의해 이란 수사 지역에서 발견됐고,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알려진 것과 달리 함무라비법전은 범죄자에게 엄벌을 가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재산 보장 등도 다루고 있고, 노예에게 일정한 권리를 인정해주기도 했다. 더 나아가 조건에 따라 노예 해방을 인정하는 조문도 존재하며, 여성의 권리 또한 다루고 있다. 가령 이혼에 대한 여성의 권리나 남편과 사별한 여성을 옹호하는 내용 등이 담긴 것이다. 계급에 따라 형벌 차이가 나타나긴 하지만 인종, 특정 종교를 기준으로 차별하는 조문은 보이지 않는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
명욱 주류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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