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도 비례도 전패… 20년 만에 ‘원외’ 추락
2024년 4월10일 오후 6시, 방송 3사 출구조사 발표가 나오자 녹색정의당 개표상황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진보정당을 지켜달라”던 마지막 읍소는 통하지 않았다. 당직자들은 한 명씩 개표상황실을 떠났다. 일부는 눈물을 흘렸다.
제2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녹색정의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상징으로 꼽혀온 심상정 후보(경기 고양갑)도, 차세대 정치인으로 꼽혀온 장혜영 후보(서울 마포을)도 지역구에서 거대 양당 후보에 밀려 3위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비례대표 선거에서는 2.14%(60만9178표)를 득표해 의석 배분 하한선인 3%를 넘기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진보정당으로서 헌정 사상 처음 받아든 10석은 20년 만에 소멸했다. 김준우 녹색정의당 대표는 “21대 의정 활동이 국민 눈높이를 충분히 채우지 못한 것 같다”면서도 “기후를 살리고 진보를 지키는 진보 정치의 여정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성 없는 정책’부터 ‘초점 없는 정당’까지
갑작스러운 몰락은 아니었다. 2022년 대통령선거에서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얻은 득표율은 2.37%에 그쳤다. 2017년 대선 때 얻은 득표율(6.17%)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대선과 2022년 지방선거의 연이은 참패로 정의당은 ‘10년평가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소용없었다. 류호정 전 의원, 박원석 전 의원, 배복주 전 부대표, 권태홍 전 사무총장 등 당의 주역들은 총선을 앞두고 사분오열해 대거 탈당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한겨레21>은 녹색정의당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무릎을 꿇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 다음날인 2024년 4월5일, 녹색정의당 유세 현장을 찾아 유권자들에게 물었다. 이날은 녹색정의당 선거대책본부가 선거 전략상 주목한 계층인 ‘청년층’에 적극적인 투표를 독려하기 위해 김준우 대표, 장혜영 의원 등이 서울 마포구 홍대 상상마당 앞에서 집중유세를 벌인 날이었다.
“여기 이렇게 20·30대가 많은데 아무도 관심이 없잖아요. 저도 앉아 쉬려다 우연히 유세를 들은 것뿐이고요. 막상 들어보니 말하는 내용이 젊은 사람들한테 전혀 와닿지 않아요. 예를 들어 청년 주거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이건 결국 세금이 필요하잖아요. 양당도 청년주택 택지 마련 같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뭘 더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구체적인) 대책이 없잖아요.” -30대 회사원 정민지씨
“장혜영 의원을 눈여겨봐왔고 녹색당·정의당이 소수자를 대변하는 정당이란 점에서 지지하지만 고민이 돼요. 저는 좌파·우파 이런 건 모르겠고 ‘나를 가장 잘 대변해줄 정당, 들어주는 것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실현할 정당’을 찾고 있거든요. 학창시절엔 기후위기에, 지금은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데 감사한 일이긴 하지만 정의당이 ‘사회의 모든 약자를 포용하겠다’는 정체성을 가져가면서 초점을 못 맞춘 것 같아요. 지지층 확보 측면에선 초점도 중요하잖아요. 예를 들면, 차별금지법만 해도 그 안에 20개 넘는 카테고리가 있는데 그럼 반발하는 세력이 너무 많고 다양해요. 당연히 정책을 현실화하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고, 지지자는 ‘현실화가 안 되는데 계속 지지해야 하나’ 고민하게 되죠.” -23살 이지아씨
“정치적 토양 문제인 것 같아요. 물론 요즘 청년층은 즐길 거리가 많아 정치에 무관심한 경향도 있지만 사실 제 친구들 보면 취업 준비, 또 취업하고 나선 직장에 자리 잡아야 해서 정치에 관심 가질 시간이 없거든요. 또 제가 사는 독일 도시 티빙겐이랑 비교하면 기후위기 심각성에 대한 인식 자체가 다르기도 해요. 거기선 ‘난 기후위기 때문에 고기 안 먹어. 비행기 안 타’ 하는 사람이 정말 많아요. 한국에선 본 적이 없어요. 독일에선 녹색당이 주류 정당인 걸 생각하면 그냥 정치적 토양이 다른 거죠. 또 하나, 지난 대선에서 ‘정의당으로 표가 분산돼 윤석열 대통령이 탄생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정의당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대선 후유증도 있었던 거 같고요.” -30살 독일 유학생 박준형씨
이들은 녹색정의당이 현실을 개혁할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 정책정당으로서 선명성이 약했다는 점, 2022년 대선 당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단일화하지 않은 ‘대선 후유증’ 등이 미래 의제의 절박함을 아직 체감하지 못한 한국인 유권자 특성과 맞물려 현 지지율을 낳았다고 봤다.
2024년의 진보란 무엇인가
하지만 유세 현장에서 느낀 더 큰 문제는 ‘무관심’이었다. 1시간30분여 진행된 유세에서 당원을 제외하면 유세를 지켜본 청년은 이들이 거의 전부였다. 대부분 시민이 “정당 이름도 처음 들어본다”며 지나쳤고 “사이비 같다”는 조롱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홍대 상상마당 한쪽에서 동시에 열린 유명 유튜버의 공개 소개팅 행사에 100여 명의 청년이 몰렸음에도 녹색정의당 유세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청년 없는 청년 유세 현장’은 녹색정의당의 위기를 상징했다. 더불어민주당의 호남이나 국민의힘의 영남 같은 지역적 지지기반이 없는 녹색정의당이 희망을 걸 만한 지지층 가운데 하나가 청년 세대다. 지난 대선 득표율의 세대별 분포를 봐도 노년층으로 갈수록 지지가 약했고 20대 이하(4.4%)와 30대(3.8%)에서 그나마 가장 큰 지지율을 보였다.
정의당 창당 때부터 함께했지만 최근 탈당한 한 인사는 “정책정당으로의 진화 실패”를 당 몰락의 원인으로 꼽았다. “이슈가 매우 크고 복잡하고 빨리 바뀌는 시대인데, 정의당 정책은 어떻게 보면 좀 관성적이거나 새롭지 못했고, 이슈 속도를 못 따라가면서 결국 ‘진보의 효능감’ 문제로 이어진 거죠. 정책이란 건 두 가지 측면이 굉장히 중요해요. 정책의 우선순위, 그리고 실제 현실화. 굉장히 많은 이해관계자와 변수가 고려되지 않은 정책은 ‘일방적 주장’일 뿐이거든요. 그런 종합적 고려나 현실적 결과 측면에서 ‘정책정당으로의 진화에 실패했다’고 볼 수 있죠.”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2024년 진보정당이 추구해야 할 진보의 내용이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과제가 남았다”고 지적했다. “진보정치의 내용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정치 세력이 무엇을 표방하고 나면 그 뒤에 특정 유권자 집단이 호응하면서 결합할 때 만들어지거든요. 뒤집어 이야기하면 ‘2024년의 진보가 무엇인가’에 대해 그 정치 주체들이 헤매고 있고, ‘나는 제일 진보적이에요’라고 생각하는 유권자들도 헤매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한편에선 시대 변화에 따라 정치 활동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매개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거든요. ‘특정 이슈’를 기반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면서요. 정당들이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정치적 리더십을 행사해야 하게 됐죠.”
정의당 공동대표를 지낸 나경채 녹색정의당 양경규 의원 보좌관도 “당의 노선이 형해화(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음)했다”고 지적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당에서 이탈한 사람들이 하나로 뭉친 게 아니라 개혁신당, 새로운미래, 더불어민주당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어요. 누구나 당에서 이탈할 수 있죠. 그런데 그 이탈의 흐름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는 건, 당의 노선이 그만큼 형해화했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니냐, 당의 노선이 내파됐다고 보는 거죠.”
당내 다양성, 그런데 정체성은?
오늘날 ‘진보정치를 지지하는 유권자’도 형해화한 상황이다. 이재묵 한국외대 교수(정치외교학)가 한국종합사회조사 누적데이터(2003~2018)를 활용해 2020년 10월 공개한 논문 ‘한국정치의 유권자 지형: 진보정당에 대한 지지와 다당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를 보면 “진보정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 정치이념의 차이는 크게 부각되지 않으며, 정책 이슈 분야에서도 두 정당 지지자들 간 선호 차이는 일부 이슈에 국한돼 나타난다”는 내용이 나온다. 특히 제21대 총선에서 “오히려 진보정당인 정의당 지지자들이 중도에 더 가까운 아이러니한 이념 분포”가 보였다. 양당 혐오에서 비롯된 제3정당 선택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이재묵 교수는 “정의당이 옛날보다 다양성 차원을 커버하다보니 지지자들이 분화했다”고 해석했다. “지금 녹색정의당이 환경, 노동뿐만 아니라 젠더까지 커버하다보니 선명성은 떨어지고 당 구성이 분화했을 가능성이 있죠. 특히 정의당에서 보여준 페미니즘 정치 지지층은 전통적인 진보정치 지지층이랑 성격이 달라 재구성된 측면이 있고요. 옛날에는 ‘지민비정’(지역구는 민주당, 비례정당은 정의당)이었잖아요.”
실제로 지역 현장에서 당원들과 소통하는 왕복근 녹색정의당 관악구위원회 위원장도 비슷한 토로를 했다. “녹색정의당의 청년 정책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대변해서 무슨 얘기를 딱 해준다’라고 하기엔 모호하게 느끼고 있어요. 청년들 눈에 확 띄는 건 없고, 심상정 대표는 5선 도전이라 오래된 정당 느낌을 주고. 또 한편에선 ‘노란봉투법’을 얘기했지만, 노동 현장과 밀착해 속 시원하게 말하는 게 줄어들었단 불만이 나오거든요. ‘요즘 여성이나 성소수자 얘기만 하고 노동 얘기는 안 하고’ 하는 식으로요. 그러니까 사실은 확고한 지지층을 정하고 그 주변을 확장해나가는 모습이 돼줘야 하는데 ‘누구 얘기를 대변하지?’가 된 거예요.”
이현우 서강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녹색당과 정의당이 힘을 합쳐도 시너지 효과가 안 났다”며 선명성의 중요성을 말했다. “(진보정치 지지자들은) 양당과 대등하지 못해도 소수의 목소리를 전하는 정당, 우리 사회가 장기적으로 가야 할 옳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정당을 바라잖아요. 여기서 녹색당과 정의당은 현실을 생각하면 지지자 동원이 어려우니 고민될 거예요. 그러나 예를 들어 ‘노동자 계층에 대한 정체성을 확실히 가져가겠다’는 식으로 표방하면 군소정당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 한계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국민이 진보정치에 기대하는 정치는 그런 쪽인 것 같거든요.”
양당으로 수렴되는 구도
선거구도와 선거제도가 녹색정의당에 불리하게 작용한 한계도 있었다. 녹색정의당은 민주당 주도의 비례대표 ‘더불어민주연합’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다당제를 위해 도입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대의를 훼손한 위성정당 참여가 아니라 독자 노선을 걷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더불어민주연합의 태생적 부조리와 공천 과정에 대한 반감의 반사효과는 녹색정의당이 아니라 조국혁신당이 가져갔다. 이강윤 한국사회여론연구소 고문은 특히 “녹색정의당이 자체 분열한 상황에서 조국혁신당이라는 화약이 터지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정당이 됐다”고 평가했다.
손희정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는 “녹색정의당은 실패 안에서도 씨앗을 뿌린 점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마포을 장혜영 후보 득표율이 8.78% 나왔어요. 마포갑 김혜미 후보는 2.03%, 은평을 김종민 후보는 3.43%였고요. 언론이 이 수치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언론 지형 안에서 양당 말고는 마이크를 주지 않고, 심판론 외에 정책 정치 노력들이 지워져버리잖아요.”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과) 역시 “독자적인 진보정당은 사실상 소멸했지만, 이것이 곧 진보의 소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보의 외연이 확대되고 있고, 노인층조차 전통적인 보수가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전통적 강경보수는 소수화되고 단명하는 추세입니다. 이런 지형은 긍정적 변화입니다. 그럼에도 ‘진보정당의 입지’는 소멸 위험에 처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담론 차원에서 노동·복지·젠더·기후 등 진보 의제를 다 가져갔고, 가져간 다음엔 제대로 안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독자적인 진보정당은 민주당과 차별화하려면 (목소리를) 극단화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인 겁니다.”
“녹색정의당, 아픈 손가락 같다”
다수가 녹색정의당을 떠나는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녹색정의당에 새로 입당하고, 녹색정의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이도 분명히 있었다. 최근 민주당을 탈당하고 녹색정의당 비례대표 정당투표를 호소한 장하나 전 의원, 3월29일 녹색정의당에 입당한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장이 그랬다. 이들에게 ‘녹색정의당’으로 상징되는 진보정치가 왜 필요한지 물었다.
“녹색정의당 비례대표 후보 4번을 받은 권영국 변호사(고 김용균 노동자 사망사건 등 노동 문제를 다뤄온 변호사)를 위해서요. 주변에서 ‘윤석열 심판론’ 얘길 해요. 그런데 저는 심판 주체가 왜 조국혁신당이어야 하는지, 기득권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 왜 또 다수 유권자가 동원돼야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장하나 전 의원의 말이다. 그는 페이스북에 “21대 (후반기) 국회 개원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169명 중 1지망으로 환경노동위원회를 선택한 의원이 0명이라는 언론 보도를 보고 부아가 치밀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일자리와 생계 위협이 대다수 국민 삶을 짓누를 때 아무도 환노위에 가지 않으려 한다니. 환노위에 권영국 변호사님이 계신다면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난다”고 쓰기도 했다.
안상미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장은 “전세사기 피해를 겪고 나니 서민의 입장,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녹색정의당의 필요성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처음 터졌을 땐 ‘사기 피해 왜 당했어. 잘 알아봤어야지’ 식의 시선이 더 많았거든요. 그때 심상정 의원님이 앞장서주셨고,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 발의도 제일 먼저 해주셨어요. 정말 바쁘게 국회에서 뛰어다니는 걸 제 눈으로 봤고요. 저희 같은 피해자들에겐 녹색정의당의 지금 상황이 진짜 아픈 손가락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보정치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간판 정치인도 한 시대의 종언을 선언했다. 심상정 의원은 4월1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울음을 참으며 “25년간 숙명으로 여기며 받들어온 진보정치의 소임을 내려놓으려 한다”고 정계 은퇴 의사를 밝혔다. “고되고 외로운 길을 함께 개척해온 사랑하는 지지자 여러분께 감사하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저와 진보정당이 진정 사랑했던 것은 이념이 아니라 이웃하며 살아가는 보통 시민의 삶이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진보정당을 만들어온 힘이고 제 자부심이었다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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