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맞이하는 담백한 마음 [주말을 여는 시]
‘아흔아홉 개의 정류소를 지나’
누군가는 이미 출발한 그곳
우리도 언젠가는 가야할 길
그럼에도 결국 두려운 진심
아흔아홉 개의 정류소를 지나
나는 살아 있고, 나는 충분히 젊어 보았고, 아버지는 출발하셨고, 나는 그 정류소에 그대로 서 있고, 배터리가 거의 다 닳았고, 내려야지 내려야지 다짐만 하다가 아버지는 먼저 출발하셨고, 이미 예순 번의 정류소를 놓쳤고, 어쩌면 급히 지나쳤고, 어쩌면 조는 척 눈을 감고 있었고, 나는, 드디어, 마침내, 반백이고, 구부정해졌고, 가팔라졌고, 헉헉거리고 있고, 그때 그 정류소 앞에 그대로 서 있고, 번쩍거리고 있고, 눈물이 나오지 않아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고, 이따금 발을 동동 구르며 저편 고갯길을 바라보고 있고, 온다던 막차는 언젠가, 벌써, 눈 깜빡일 사이, 가버린 거 같고, 칼칼한 첫차는 십중팔구 그냥 지나친 거 같고, 꿈결인 듯 단숨에 횅하니 지나간 방금 그게 막차였던 거 같고, 막차를 가장한 첫차였던 거 같고, 으름장만 놓고 영영 출발하지 않은 막차였던 거 같고, 어떡하나 인사도 못했는데, 손을 흔들어주지도 못했는데, 그게, 영영, 다시는, 아니 올, 막차였던 거 같고, 다시는 손들어 불러 세울 필요가 없어진 첫차였던 거 같고, 어떡하나 이를 악물고 조는 척 지나쳐야 할 막차였던 거 같고
최영철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데뷔
·백석문학상 등 수상
·시집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 등 다수
「멸종 미안족」, 문학연대, 2021.
삶은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닿기 전까지 언제나 과도기이고 진행형이다. 그래서 움직임은 살아 있는 상태를 명징하게 증명해줄 절대 조건이다. 존재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힘겨운 족적을 남긴다. 그러다 '정류소'를 만나면 잠시 생을 반추해 보거나 휴지休止 속에서 생의 방향성을 고민하게 된다. 계속해서 같은 노선의 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노선으로의 전환을 꾀할 것인가.
젊은이들이라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모험을 감행하겠지만 노년에 가까운 세대라면 생을 반추하며 가던 길로 계속 진입해 주어진 운명대로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다만, 이것은 일반적인 경우다. 나이와 상관없이 개척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고 일평생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최영철 시인의 「아흔아홉 개의 정류소를 지나」에 나오는 화자는 어떠한가. 화자는 정류소에서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내려야지 내려야지 다짐만 하다가" 먼저 출발하신 아버지와 대비되게 화자는 타야지 타야지 하면서 차를 내내 기다린다. "나는 살아 있고, 나는 충분히 젊어 보았고"를 강조했기에 아버지는 분명 죽음으로 향하는 차를 타셨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인해 화자는 쉽게 차를 탈 수 없다. '죽음'은 언젠가 맞이해야 할 '통과제의'지만 살아 있는 인간에겐 두려운 순간이다. 그런데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이따금 발을 동동" 구르면서 '저편 고갯길'로 넘어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다. 그래서 화자는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려면 '죽음'이 선행해야 하기에 "이미 예순 번의 정류소를" 놓치는 일을 반복한다. 화자는 일부러 "조는 척 눈을 감고" "급히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구부정해지고 가팔라지고 헉헉거리고 있는 나이를 먹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이를 먹었는데도 마음은 여전히 이중성을 띠고 있다. '가야 할 곳이지만 지금은 아니다'란 생각과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그래서 '막차'를 생각하는 화자의 감각은 스스로도 의심할 정도로 혼선을 빚고 있다.
자신이 타야 할 '온다던 막차'는 "벌써, 눈 깜빡일 사이, 가버린 거" 같다. 아니다. 이미 "꿈결인 듯 단숨에 횅하니 지나간 방금 그게 막차였던 거 같고, 막차를 가장한 첫차였던 거 같고, 으름장만 놓고 영영 출발하지 않은 막차였던" 것도 같다. 진짜로 눈앞에 '막차'가 나타난다면 화자는 과연 탈 수 있을까. 선뜻 타지 못할 것이다.
「아흔아홉 개의 정류소를 지나」에 나오는 화자처럼 우리는 그렇게 '종착지'에 다다를 수 있는 '막차'를 쉽게 탈 수가 없다. 어쩌면 꼭 타야 할 때마저 스스로 타지 않는 것이 진실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죽음을 향한 우리의 솔직한 태도이자 두려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리 절실하게 그립다 해도 "이를 악물고 조는 척" 지나치고 싶은 것이 바로 죽음을 향한 우리의 이중적인 마음이다.
최영철 시인은 그런 인간들의 심리를 '정류소'라는 상황을 통해 상징화해 솔직담백하게 형상화했다. 감각적인 언술과 잔잔한 파도를 타듯 다가오게 만드는 반복적 리듬. 이런 장점까지 더해져 시를 읽는 맛이 배가하고 있다. 중년에 들어선 독자들이라면,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동시에 생에 애착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흔아홉 개의 정류소를 지나」를 꼭 읽어보길 바란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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