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자도 피곤하고…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호르몬 때문이었네

송은아 2024. 4. 13.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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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신 녹초 되면 호르몬 생산 차질
예민하고 기운 빠지고 수많은 증상
애디슨병 앓던 케네디 부신 손상
미·소 회담 당시 호르몬 조절 안 돼
외교협상 실패… 쿠바 미사일 위기
호로몬이 삶에 미치는 영향 해부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막스 니우도르프/배명자 옮김/어크로스/2만2000원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애디슨병’을 앓았다. 염증으로 부신이 호르몬을 너무 적게 생산했다. 당시 케네디가 받은 치료는 코르티솔 수치의 급변동을 유발했다. 코르티솔이 부족하면 기운이 빠지고 침울해진다. 이 때문에 케네디 대통령은 중요 일정이 있을 때는 인공 호르몬을 주사해 코르티솔 수치를 조절했다.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1961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고조되기 전 미국과 소련(러시아)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하필 이 자리에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가 지각했다. 기다리는 동안 호르몬 수치가 내려가는 바람에, 케네디는 회담에서 녹초가 돼 젖은 자루처럼 앉아 말도 제대로 못 했다. 역사가들은 이 외교협상이 실패한 탓에 양국 분위기가 악화돼 핵 미사일이 쿠바를 겨냥했다고 지적한다.
호르몬은 우리 몸의 지휘자라 할 만큼 요람에서 무덤까지 방대한 영향을 미친다. 호르몬 균형이 깨지면 각종 질환에 걸리거나 성장·발달에 지장을 받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균형을 벗어난 호르몬이 우리 삶을 얼마나 좌지우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신간 ‘호르몬은 어떻게 나를 움직이는가’는 호르몬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각 단계별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저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대학의학센터의 당뇨병 센터 소장으로 당뇨병 연구자이자 내분비내과 전문의이다.

호르몬은 우리 몸의 지휘자다. 케네디처럼 애디슨병을 앓으면 부신이 손상돼 코르티솔과 알도스테론 생산이 줄어든다. 그러면 기운이 없는 것 외에도 짠 음식이 먹고 싶고 피부와 점막은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검어진다. 케네디 역시 피부 색소침착이 뚜렷해 멋지게 태닝한 것처럼 보였다. 1960년 대선 TV 토론에서 상대 후보인 리처드 닉슨이 케네디 옆에 섰을 때 닉슨의 얼굴은 말 그대로 창백해 보였다. 저자는 이것이 케네디의 승리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 말한다.

애디슨병의 시발점인 부신은 신장 위에 붙어 있다. 크기는 3∼5㎝, 무게는 8g에 불과하지만 알도스테론, 아드레날린, 코르티솔, 테스토스테론, 노르아드레날린 등 여러 호르몬을 생산한다. 이 호르몬들의 주요 기능은 스트레스에 잘 대처하게 하는 것이다. 부신이 녹초가 되면 호르몬을 적게 생산한다. 그 결과 아무리 자도 피곤하고 기억력이 떨어지고 혈당수치가 올라가며 자극에 예민해진다. 이는 번아웃의 일반적 증상이다.
막스 니우도르프/배명자 옮김/어크로스/2만2000원
부신이 테스토스테론을 과다하게 생산한 결과로 추정되는 흥미로운 사례로는 교황 요하네스 7세가 있다. 855년 전임 교황이 숨지자 후계자가 된 요하네스 7세는 교황 서임식 행렬을 하다가 성클레멘테 대성당 근처에서 딸을 낳았다. 교황이 ‘남장 여성’이라는 데 충격받은 군중은 산모와 딸에게 돌을 던졌다고 한다. 저자는 여러 증거로 볼 때 이 ‘최초의 여성 교황’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며, 그가 부신생식기증후군을 앓아 남성성을 보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호르몬은 새 생명의 탄생부터 노화에 이르기까지 전 생애를 좌우한다. 저자는 ‘생식은 뇌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호르몬시스템은 뇌의 깊은 곳에서 몸을 조종하기 때문이다. 사춘기가 되면 시상하부가 ‘생식샘자극호르몬 방출호르몬’을 생산하고, 이것이 뇌하수체를 자극해 난포자극호르몬과 황체형성호르몬이 나온다. 두 호르몬은 고환과 난소로 이동해 성호르몬 생산을 자극한다.

임신·출산 과정에서 호르몬의 영향은 잘 알려져 있다. 호르몬은 유아기 발달 과정에서도 중요하다. 보통 출생 한 달 전부터 고환이 음낭으로 내려오는데 20명 중 한 명은 고환 하나가 내려오지 않는다. 산모의 지나친 식물성 여성호르몬 섭취나 환경 유해물질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 ‘잠복고환증’은 성인이 돼서도 생식능력 감소를 유발할 위험이 크다. 1950년대 초 네덜란드 최고 여성 육상선수였던 푸크여 딜레마는 일반 여성보다 테스토스테론이 더 많이 분비됐다. 나중에 DNA를 검사해보니 그는 여성이면서 남성이었고, 복강에 작은 잠복 고환이 있었다.

청소년·성인은 물론 노년기도 호르몬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나이 들수록 부부가 닮는다고 하는 것도 호르몬 때문이다. 60세가 되면 여성은 테스토스테론이 지휘봉을 잡고, 남성은 에스트로겐이 젊은이보다 최대 세 배 더 많아진다. 남성 노인의 외모가 여성보다 낫다면 에스트로겐이 피부 미용에 이로워서일 수 있다. 또 늘어난 여성호르몬으로 인해 남성 노인은 ‘맥주 배’가 되기 십상이다. 반면 나이 든 여성은 테스토스테론 때문에 얼굴 폭이 넓어진다.

책은 이 외에도 거인증, 성 정체성, 과체중, 갱년기, 체취, 수면 등에 미치는 호르몬의 방대한 영향력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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