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까지 빌려봤니?’ 소유할 수 없지만 매력적인, 공유의 시대가 온다
1인 가구 정현호씨는 최근 새 혈압계를 사기 위해 검색하던 중 동네 보건소에서 혈압·혈당계를 무료로 대여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건강 상담까지 포함된 맞춤형 서비스에 정씨는 고민 없이 대여를 선택했다.
‘혹시나’ 또는 ‘언젠가’ 하는 미련으로 끌어안고 있던 집 안 애물단지와의 작별 시간이 머지않아 보인다. KT경제경영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대여시장 규모는 2016년 25조9000억원에서 2020년 40조원으로 급성장했다. 2025년에는 1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에어팟, 침구류, 청소기 등 생활용품부터 텐트, 골프채 등 취미용품까지 품목 또한 다채롭다. 불필요한 소유보다 합리적인 대여를 추구하는 이들은 어떤 서비스를, 어떤 방법으로 이용하고 있을까.
그땐 필요해서 샀는데…결국엔 짐이더라
미국의 사회비평가이자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은 2001년 저서 <소유의 종말>을 통해 “산업 자본주의의 시장 경제가 인터넷을 필두로 한 네트워크 경제로 바뀌게 될 것”이라며 “제품의 수명이 점점 짧아지고 물품과 서비스의 이동 영역이 날로 확대되는 네트워크 경제에서 부족한 것은 사람의 관심이지 물건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연년생 초등학생 자매를 키우는 박정혁·한미란 부부는 매 주말 ‘가족 독서 시간’을 정해두고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다. 시기별로 전집을 마련하고 집 안 곳곳에 비치한 다음 책 읽는 모습을 솔선수범한 부부의 노력 덕에 두 딸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그러나 학년이 높아지고 두 아이의 도서 취향이 달라지면서 공급이 수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비용과 보관 공간에 대한 부담까지 커지면서 부부의 고민 역시 깊어졌다.
박씨는 “아이들이 어릴 때는 도서관을 이용했지만 인기 있는 책은 언제나 대기가 필수였다. 더욱이 맞벌이 부부인 우리는 평일 도서관 방문이 쉽지 않아 상호 대차(협약된 도서관끼리 소장한 자료를 서로 주고받으며 이용자에게 빌려주는 것) 서비스 이용도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새 책을 구입하고 중고 거래로 정리하는 방법도 활용해봤지만 상세 설명을 올리고 상대방과 시간을 조율하는 과정이 번거로웠다. 부부는 과거 이용했던 장난감 대여 서비스를 떠올렸고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책 대여 서비스를 찾아냈다.
현재 부부가 이용하는 도서 대여 서비스 업체는 앱을 통해 원하는 도서를 예약하면 다음날 택배로 보내주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자체적인 기준에 따라 큐레이션된 책을 보내주는 서비스를 선택할 수도 있다. 두 사람은 “연령대별 필독서부터 어른들을 위한 베스트셀러까지 장르도 다양해 어지간한 동네 도서관 못지않다”고 평가했다.
대여 비용은 권당 800~1000원 선이다. 업체에 따라서는 연간 회원권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는데 대여 권수와 기간, 가격 등이 천차만별인 만큼 별도의 확인이 필요하다. 최근에는 도서를 대여하며 본인이 소장한 도서를 위탁하면 이를 다른 이들에게 빌려주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서비스를 추가로 시행하는 업체도 등장했다.
한씨는 “책의 소장 가치를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경력직’ 엄마가 되고 보니 아이들의 책은 찰나의 필수품인 경우가 많더라. 한 권에 집중하는 시기가 짧은 아이들은 ‘새것’보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며 “최소 2~3개 업체를 비교해보고 자신의 취향과 생활 방식에 맞춰 이용하길 바란다. 그래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1인 가구, 널 위해 준비했어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주민등록상 전체 가구 수는 2391만4851개다. 이 중 1인 가구는 993만5600개로, 전체 가구의 42%에 달한다. 1인 가구를 겨냥한 대여 서비스가 성행하는 까닭이다.
서울청년센터 ‘마포 오랑’은 1인 가구의 전동드릴, 레이저 거리 측정기 줄자 등 공구 세트, 공기펌프, 와플 기계 등 생활용품과 불법촬영 탐지기, 공기질 측정기 등을 빌려준다. 마포구에 거주하고 있거나 마포구 소재의 직장, 단체, 학교 등을 다니고 있는 만 19~39세 1인 가구 청년이 그 대상이다.
대학생 김효민씨는 “혼자 살아도 갖춰야 할 가전, 생필품이 있다”면서 “그런데 현실은 이상과 다르게 좁다. 공간을 최대한 여유 있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미니멀 라이프가 필수다. 1평의 공간 비용을 고려했을 때 소유보다 대여가 더 가성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타 자치구 대비 대학교가 많아 1인 가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는 성북구는 지난해 7월부터 ‘1인 가구 물품 대여 서비스’를 진행 중이다. 구는 노트북, 미니 빔, 침구 소독기, 전기히터, 차량용 청소기, 폴라로이드 카메라 등 총 28종 품목의 80여개 물품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수요에 따라 목·어깨 안마기, 가습기, 인덕션 등 신규 품목을 추가하기도 했다. 대여료 단돈 1000원. 한 번에 최대 2품목, 1주일간 사용 가능하며 다음 예약이 없다면 1주일 연장할 수 있다.
해당 서비스를 종종 이용한다는 대학생 조현희씨는 “지난겨울에는 1박2일 여행을 위해 여행용 가방을, 이번 주말에는 봄맞이 대청소를 위해 스팀 청소기를 빌렸다. 사기엔 부담스럽고, 없으면 아쉬운 제품들을 빌릴 수 있어 만족스럽다”며 “어떤 제품이든 중고시장에 내놓는 순간 감가상각이 되는데 특히 단발성으로 사용하는 물건은 그 폭이 더 크게 다가온다. 이런 상황에서 소유만을 고집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
‘친환경 소비’를 목적으로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들도 많아지는 추세다. 직장인 채미록씨는 “재활용이나 업사이클링도 좋지만 이보다 더 손쉽게 친환경 소비를 실천할 방법은 재사용”이라면서 “혼자 살면서 불필요한 물건으로 가득 채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물건을 공유하며 필요할 때 사는 것이 자원 이용 효율성을 높이는 합리적 소비”라고 강조했다.
기숙사에 거주하는 이들을 위한 이불 대여 서비스도 인상적이다. 대체로 이불, 베개, 패드를 대여해주는데 짧게는 3개월, 한 학기마다 침구류를 챙겨야 하는 이들에게 만족도가 높다. 대학생 최진희씨는 “기숙사로 배송받을 수 있고 세탁도 별도로 해주는 것이 장점이다. 퇴실할 때에도 부담이 없다”고 설명했다.
아파트 같은 경우 관리사무소가 있지만 단독주택은 개인이 직접 수리를 하지 않으면 별도의 수리업체를 불러야 한다. 상대적으로 주거 여건이 취약한 단독주택 밀집 지역 주민을 위한 대여 서비스도 호평을 받고 있다. 울산 동구 화정 마을관리소는 톱, 전동드릴, 망치 등 44가지 공구를 무상으로 대여하고 있다. 관리소 측은 “특히 어르신들의 만족도가 높다”고 밝혔다.
다이슨부터 롤렉스까지 빌려씁니다
‘솔캠’(솔로 캠핑)이 인기를 끌며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플랫폼을 이용해 캠핑 장비를 대여하는 것도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비용이 저렴하고 불필요한 자원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서비스로 평가받고 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공유허브 사이트에서는 텐트, 캠핑 의자, 코펠, 웨건 등 캠핑용품 대다수를 무료로 대여할 수 있다. 충남 당진 나래센터에서는 당진에 거주하거나 활동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캠핑용품 무상 대여 서비스’를 제공한다. 원터치 팝업 텐트, 테이블 세트, 방수 돗자리, 감성 랜턴, 캠핑 버너, 조리도구, 화로대, 토치 등 35종 72개 물품이 준비됐다.
한복, 휠체어를 비롯해 각종 생활용품을 빌릴 수 있는 광주 남구청 물품 공유센터의 경우 언제나 캠핑용품이 ‘대여 1순위’로 꼽힌다. 이곳은 최대 물품 가액의 2%를 대여료로 받는데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용품을 이용할 수 있어 자주 캠핑을 떠나는 이들에게 입소문이 났다. 지역 주민인 공현득씨는 “캠핑을 떠나려는데 휴대용 난로가 고장 나 급하게 대여한 적이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매우 깨끗하게 관리돼 있어 대여 용품에 대한 선입견을 버린 계기가 됐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나 역시 용품들을 기부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소비 전 경험을 통해 활용도를 확인하고자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전나영씨는 해외 유명 브랜드 헤어드라이어 구매를 고민하다 ‘픽앤픽 대여 서비스’를 신청했다. 이는 CU편의점이 MZ세대를 겨냥해 2022년 첫선을 보인 서비스로 헤어드라이어, 스마트폰, 게임기, 골프채 등 300여종의 물품 대여가 가능하다.
전씨는 “저렴한 가격이 아니다 보니 한참 동안 쇼핑몰 장바구니에 넣어두고 고민했다. 광고처럼 손재주가 없어도, 혹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람들처럼 다양한 머리 모양을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라면서 “결국 다른 제품을 사긴 했지만 ‘가심비’만 따지면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가방이나 의류, 액세서리 등을 월 단위로 빌릴 수 있는 의상 대여 서비스도 MZ세대 사이에선 ‘똑똑한 소비’로 통한다. 한정된 옷으로 변화를 주는 어려움과 계절마다 사는 의류 비용을 고려했을 때 다양한 연출이 가능한 대여 의상이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고가의 시계나 명품 가방 등을 구독 형태로 빌려 쓸 수 있는 대여 서비스도 빼놓을 수 없다. 한 명품 대여업체 관계자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격식에 맞는 의상을 입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이용자 대다수는 단 하루를 위해 고가 제품을 사는 것보다 빌리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금액이 부담스럽다면 사회 초년생을 위한 무료 정장 서비스를 이용해보는 방법도 있다. 2016년 서울을 시작으로 부산, 대구, 광주 등 일부 지자체들이 취업준비생을 위해 면접 정장을 무료로 대여해주고 있다. 트렌드에 따라 대여 정장을 업그레이드하고 처음 정장을 입는 취준생을 위해 직종 등에 맞게 스타일링을 추천해주기 때문에 후기 평이 좋은 편이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경한 풍경이지만 해외에서는 사람을 빌리는 서비스도 존재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지난해 한 대중목욕탕이 ‘아빠 대여’ 서비스를 시행해 소셜미디어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빠 대여’ 서비스는 훈련받은 남성 도우미가 엄마와 함께 여탕에 들어가지 못하는 남자아이를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입힌 후 지정된 장소로 안내하는 서비스다.
일시적인 이벤트로 끝날 것 같았던 일본의 ‘친구 대여’ 서비스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용자들은 주로 모바일 앱을 통해 상대의 프로필을 확인하고 함께 식사하거나 영화를 보는 식으로 시간을 보낸다고 알려져 있다.
왜 이렇게까지 빌려?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소유의 종말’이 찾아왔을까. 업계 관계자들은 주 소비층이 달라지고 이들의 소비 패턴이 반영된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실용성을 추구하고 가치 소비를 하는 이들에게 대여 서비스는 합리적인 소비 행태라는 것이다.
과시적인 소비에 큰돈을 지출하면서 경제적 부담을 느낀 이들이 고물가 시대를 만나 움츠러드는 과정에서 대여라는 방식이 두드러졌다는 견해도 유의미하다. 박영한 트렌드 분석가는 “불확실한 시대가 길어지면서 확실함에 대한 욕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특히 MZ세대는 쇼핑에서도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쓸 수 있는 대여 서비스가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개인의 만족도를 높이는 스마트한 방식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소비 욕구는 크지만 구매력이 낮은 세대에게 대여 서비스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매력적인 대안이다. 소형가전 대여업체를 운영하는 정진영 대표는 “1인 가구를 비롯해 소규모 가구가 늘고 소규모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빌려 쓴다는 개념이 예전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라면서 “소유가 불가하더라도 삶의 질은 유지하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을 겨냥한 서비스들이 쏟아지면서 대여 서비스가 더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것 같다”고 언급했다.
또한 정 대표는 “비데, 정수기 등에 국한됐던 대여 품목의 범위가 넓어지고 구독경제 서비스가 보편화되면서 꼭 소유하지 않아도 (물건의 가치를) 경험해볼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진 것 같다”면서 “소모품일수록 대여를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는 계산도 이런 분위기에 일조했다”고 말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시간과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획득할 수 있는 시장, 소유의 개념을 달리 보는 세대 간 견해차가 이런 변화를 불러왔다고 이야기한다. 경험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에게 물건은 ‘소유의 대상’이 아닌 ‘사용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 교수는 “풍족하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에게 소유는 곧 재산이었다. 그러나 현세대는 이보다 사용성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한다”면서 “‘잘 산다’가 과거와 다르게 ‘잘 사용한다’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 때문에 공유 제품일지라도 만족감만 준다면 크게 상관이 없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또한 “여기에 윤리적 소비, 즉 자원의 선순환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며 이와 같은 소비 형태가 ‘궁색 맞다’가 아닌 ‘합리적이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지윤 기자 ju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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