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옥이 부른 ‘사월의 노래’를 들으며
[강성곤의 뭉근한 관찰]
박목월이 지은 아름다운 시
읊조리며 봄날을 만끽한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1절)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지를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 아래서 별을 보노라.”(2절)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 어린 무지개 계절아.”(후렴)
4월인데 이 노래를 모르는 체 지나칠 수는 없다. 박목월 시 김순애 곡 ‘사월의 노래’. 메조소프라노 백남옥의 노래로 들어야 제격이다. 그녀는 그윽하고 정감 있고 담백하고 고상하게 노래한다. 게다가 빼어난 미인이다. 44세 때 녹음한 1988년 한국 가곡 특선 제3집은 보배로운 유산이다. 세월은 무심하고 야속한 것이 맞는다. 백남옥은 고희(古稀)를 지나 어언 산수(傘壽), 여든을 바라보고 있다.
노랫말은 박목월(1916~1978)이다. 박두진⸱조지훈과 더불어 청록파의 대표 격. “다음 중 청록파 시인인 사람은?” 학창 시절 국어 시험의 단골 문제였다. 다른 이름에 비해 박목월은 상대적으로 각인되었던 기억이 있다. 목월이라는 운치 있는 아호(雅號) 때문인 듯하다.
경북 경주금융조합 서기 박영종(朴泳鍾)은 어느 날 밤 나뭇가지에 걸린 달 모습이 너무 고와 필명을 목월(木月)로 짓는다. 박목월(朴木月)이 된 이유다. ‘사월의 노래’는 1953년, 목월이 37세 때 지었다.
“목련꽃 핀 나무와 잔디밭에서 책을 읽는 여학생들 모습을 보며, 힘들고 구지레하던 피란살이를 잊고, 새봄 훌쩍 떠나고 싶은 유혹이 떠올라 썼다.” 이화여고 교사 때 일이다.
왜 하필 베르테르였을까?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 낭만주의 시대의 키워드 ‘슈투름운트드랑(Sturm und Drang)’, 곧 질풍노도(疾風怒濤) 시대 작품이다. 정열적이며 감수성이 풍부한 베르테르는 고결하고 아름다운 여인 로테와 무도회에서 조우한다. 둘이 처음 만난 시점이 바로 어느 봄날이었다. 천둥 번개가 그친 후 청신한 공기가 가득한 저녁, 서로에게 들려줄 시를 소개하는데 공교롭게 똑같이 클롭슈토크의 ‘봄의 축제(Frühlingsfeier)’였던 것. 운명이었다! 베르테르는 로테를 향한 격정적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다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해 삶을 마감하고야 만다. 목월이 먼 나라 독일의 소설 속 청년을 ‘사월의 노래’에 등장시킨 배경일 터.
작곡은 김순애(1920~2007)다. ‘그대 있음에’라는 명곡 반열의 우리 가곡을 빚어낸 이름. 원래 문학도여서 글솜씨도 뛰어났기에 ‘네 잎 클로버’라는 곡에서는 작사와 작곡을 겸했다. “노을에 물든 반달, 고요한 미소에/ 녹음이 춤춘다 정열의 날개, 꿈에 어리어/ 아아, 행복의 네 잎 클로버/ 아아, 사랑과 젊음의 영혼아 빛나라.”
김순애의 젊을 적 ‘우리 음악을 토대로’라는 글을 보면 ‘우리 음악의 변화’와 ‘정체성 있는 한국 음악 문화’를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가 지닌 전통음악을 저버리고 서양음악만을 숭상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라며 사자후를 토하기도 한다. 멋지지 않은가.
시 전문지 ‘월간 시인’에서 원로 시인 이근배(84)는 말한다. 우리나라는 명실공히 시와 시인의 나라라고. 해마다 수백 명이 시인으로 등단하고, 3만명이 넘는 시인이 시집을 3000권 낸다. 시 세계, 시 천국이다. 모름지기 시(詩)란 무엇인가? 言+寺 아니던가. 곧, 사원(寺院)에 있을 때 갖는 겸허한 마음가짐처럼 정제되고 고아(高雅)한 말의 농축이란 의미이리라.
아름다운 시는 백지 위에 그저 잠자기보다 멋지게 읊조려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1987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시인 만세’라는 거대한 시 낭송 경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시민 김성천씨가 조병화 시인의 ‘내일’을 멋들어지게 소화해 대상을 받는다. 그러나 ‘시인 만세’는 그뿐, 이후 시민들의 관심이 시들해지고 주요 언론의 외면으로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요란하고 잔망스러운 티브이, 시끄럽고 어수선한 라디오, 표피적이고 찰나적인 언필칭 ‘소셜미디어’까지.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등속 속에서 삶을 축내며 살아야 할까. 낭독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 가곡으로 마음을 정화하는 시도는 그저 의고적(擬古的) 아날로그 취향의 멍에를 써야만 하는지.
불교에선 ‘가피’라는 말을 쓴다. 기독교의 은총⸱은혜⸱축복에 해당하는데 결이 다르다. 더할 가(加), 입을 피(被)다. 부처가 중생의 노력, 정성에 덕을 보태준다는 의미. 4월은 자연의 가피다. 시와 시 낭송, 그리고 우리 서정 가곡을 제대로 만끽하는, 눈부신 봄날을 마주하고 싶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임영웅 연말 콘서트 초대합니다”… 이 문자 링크, 누르지 마세요
- 토요일 세종대로·남대문로 일대서 대규모 집회...교통 혼잡 예상
- “엄마 멜라니아 억양 닮았네”…트럼프 막내아들 어린시절 영상 화제
- [속보] 이재명 , 1심 징역 1년 집유 2년... 확정 땐 대선 출마 못해
- [속보] 민주당 지지자, 폭행 혐의로 서울중앙지법서 현행범 체포
- 태국 마사지숍 생중계한 한국인… 제지한 업주 폭행 혐의로 체포
- Higher deposit protection in South Korea: What’s next for banks and savers?
- 법원, ‘연세대 논술시험 유출’ 관련 효력정지 가처분 인용... 합격자 발표 중지
- “성인방송에 사생활 공개” 아내 협박‧감금 전직 군인, 항소심에서도 ‘징역 3년’
- 이재명 서울중앙지법 도착... 기자들 질문에 ‘묵묵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