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추념탑 ‘의병 처형상’ 속 의병, 진짜 의병인가 떼강도인가?[박종인 기자의 ‘흔적’]
부실 검증이 낳은 혼돈… 서대문 순국선열추념탑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독립공원에는 ‘순국선열추념탑’이 있다. 해마다 순국선열의 날인 11월 17일이면 탑 앞에서 기념식이 열린다. 탑은 1992년 광복절에 서울시가 설치했다.
뒷면에 설치된 대형 화강암에는 ‘독립 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부조 8개가 조각돼 있다. 그런데 이 부조들 가운데 하나는 의심스러운 장면이 조각돼 있다. 서민을 괴롭힌 잡범 처형 장면과 흡사하다. 왼쪽에서 셋째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은 의병이 아니라 대한제국 시대 ‘상습 절도’와 ‘집단 강도’를 저지른 ‘강력범 처형 장면’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니까 탑이 설치된 1992년 이래 32년 동안 대한민국 시민들은 민중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잡범들을 추모하고 그 범죄 행각을 기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학계와 정계가 정확한 사료(史料) 검증 없이 독립운동사를 기록해 온 잘못된 관행 탓이다.
순국선열 기념탑
‘순국선열’은 ‘국권 피탈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한 사람’을 뜻한다(’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4조). 순국선열 기념일은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을사조약 체결일인 11월 17일을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정한 이래 건국 이후에도 기념해 온 날이다.
1992년 8월 15일 서울시는 이들을 기리는 순국선열추념탑을 제막했다. 높이 22.3m짜리 탑에는 14도(道)를 뜻하는 태극기 14개가 조각돼 있다. 뒷면 폭 40m짜리 화강암에는 순국 선열 활동상이 부조돼 있다. 모두 여덟 가지 활동상은 ‘항일 의병 무장상’ ‘윤봉길·이봉창 열사 상징상’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 열사 운동상’ ‘3·1 독립 만세상’ ‘안중근 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 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다.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부조들
맨 왼쪽에는 의병 활동상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인 ‘양평 의병 사진’을 모티브로 항일 의병 무장상이 조각돼 있다. 1907년 9월 정미의병 활동상을 기록한 영국 ‘데일리메일’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Mckenzie)가 촬영한 사진이다.
매켄지는 그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열여덟 살에서 스물여섯 살 정도. 병사 6명 가운데 5명은 총기 종류가 다 달랐다. 모두 쓸모없는 총이었다. 한 사람은 옛 조선군 화승총과 화승과 화약통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선군 라이플을, 한 사람은 미국에서 할아버지가 열 살짜리 손주에게나 선물할 딱총을 가지고 있었다. 녹슨 중국제 피스톨도 보였다.’(매켄지, ‘The Tragedy of Korea’, E.P. Dutton&Co., 1908, pp.200~201) 부조에는 사진에 등장하는 의병 13명 가운데 인상적인 인물 7명을 추려서 조각해 놨다. 대한제국 군복을 입은 지휘관과 앳된 소년병까지 매켄지가 본 의병들 모습이 새겨져 있다.
이봉창·윤봉길 거사와 유관순, 3·1 만세, 안중근, 의병 체포와 처형, 청산리까지 다른 부조상도 해당 인물이나 사건을 쉽게 연상시키는 장면들로 구성돼 있다. 문제는 왼쪽에서 셋째,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이다. 이 작품에는 ‘집단 교수형을 당한 의병들’이 조각돼 있다.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의 원본 사진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에는 한복을 입고 집단 교수형을 당한 인물 7명이 조각돼 있다. 통나무를 얼키설키 묶은 처형대에 밧줄로 처형당한 의병들이 담담하게 묘사돼 있다. 이 장면 또한 모티브가 된 사진이 존재한다. 식민 시대 일본 기념품점에서 유통시킨 사진들 가운데 하나다. 이 사진에는 추념탑 부조 속 처형대와 유사한 처형대에 한복을 입은 남자들이 걸려 있다. 모두 12명인데, 상투를 한 남자도 보인다. 추념탑에는 1. 사진 왼쪽 끝 4명 중 3명과 2. 오른쪽 8명 가운데 왼쪽 끝 삭발 인물과 상투를 하고 등을 보인 인물, 가슴을 드러낸 인물을 순서를 바꿔 조각하고 3. 기둥 뒤쪽 겹친 사람들을 한 사람으로 조각한 뒤 ‘독립군 의병 순국선열 처형상’이라고 명명했다. 과연 이들이 ‘집단 처형당한 의병’일까.
언제 촬영한 사진인가
사진 자체에 이들 정체를 알려주는 힌트들이 숨어 있다. 우선 이 사진엽서 아래쪽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한국 풍속: 죄인의 교살(絞殺)’. ‘한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 시대 조선과 구별해 부르던 명칭이다. 이 형 집행 시기가 1910년 이전임은 확실하다.
더 구체적으로 보자. 이 사진은 1904년 1월 2일부터 1905년 10월 26일 사이에 촬영된 사진이다. 기간을 확정할 수 있는 힌트는 배경에 보이는 흰옷과 흰 갓을 쓴 군중이다. 흰 갓, 백립(白笠)은 조선과 대한제국 국장(國葬) 때 백성이 착용했던 복식이다. 국장이 벌어지면 1년 동안 상하를 막론하고 백성은 흰 갓을 써야 했다. 대한제국 시대에 국장은 두 차례 있었다. 1904년 1월 2일 헌종비 홍씨 명헌태후가 죽었다.(1904년 1월 2일 ‘고종실록’) 이후 1년간 대한제국 황민은 모두 백의와 백립 착용이 의무였다. 이 국장이 끝나기 두 달 전인 1904년 11월 5일 황태자인 순종비 민씨가 죽었다(1904년 11월 5일 ‘고종실록’). 그래서 대한제국 사람들은 이날부터 음력으로 1년이 지난 1905년 10월 26일까지 또 백립과 백의를 착용했다. 따라서 이 사진은 1904년 1월 2일~1905년 10월 26일 촬영한 사진이고 형 집행 또한 그 기간에 있었다.
집단 처형된 절도, 강도범
서울특별시는 이 장면을 일본군에 의한 의병 처형 장면이라고 단정하고 추념탑에 조각해 놨다. 과연 그럴까. 다른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을 본다. 아래 이 사진은 1906~1907년 조선과 만주, 일본을 여행한 프랑스 무관 레오 바이람(Leo Byram)의 기행문 ‘작은 일본이 크게 되리라(’Petit Jap deviendra grand’, Berger Levrault, 파리, 1908)’라는 책 75페이지에 실려 있다.
처형대 주변에 서 있는 형리(刑吏)들 또한 백립과 백의를 착용했다. 조선인이다. 처형장 어디에도 일본군은 보이지 않는다. 바이람은 ‘몇 페이지의 역사’라는 챕터 속 일본의 침략 부분에 이 사진을 싣고 ‘일제의 탄압-교수형’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바이람 본인이 촬영한 게 아니라 구매한 사진이다. 바이람은 1906년 대한제국에 입국했고 이때는 국장이 종료되고 일반 복장으로 환원된 이후다. 또 구한말 이래 조선 풍물을 촬영한 사진이 인화 혹은 엽서로 대량 제작돼 일본과 서구로 유통됐다. 바이람의 사진 설명은 구매 과정에서 생긴 착오거나 본인 선입견일 확률이 크다. 당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을 미개국으로 보는 일본이 무작위로 생산한 사진들을 서양 언론이 검증 없이 인용해 기사 방향에 맞게 마음대로 설명을 붙인 탓이다.
추념탑 부조 왜곡을 추적해온 부산과기대 경찰행정학과 이덕인 교수는 “1909년 7월 12일 사법권이 통감부로 넘어갈 때까지 사법권은 대한제국 정부가 행사했다”고 했다. 일본이 출판한 각종 사진첩에는 의병토벌작전 때 체포하거나 처형한 조선인 사진에 대해서는 자기들 행위임을 은폐하지 않고 기록해놓았다.
그렇다면 사진 속에 등장한 이들은 누구인가. 떼강도요 도둑들일 가능성이 크다. 사형은 국왕 허가 사항이다. 실록에 따르면 1904년 1월 2일~1905년 10월 26일 국장 기간 국왕 고종이 교수형을 허가한 사람은 모두 144명이다. 고종은 1904년 2월 7일 ‘살인 강도범’ 42명, 3월 9일 ‘살인범’ 14명과 ‘강도범’ 6명, ‘절도범’ 10명, 3월 15일 ‘강도범’ 등 27명, 1905년 7월 22일 ‘강도, 절도, 살인범’ 45명에 대해 교수형을 윤허했다(해당날짜 ‘고종실록’). 이 가운데 사진에 나오는 죄인 12명과 숫자가 일치하는 형 집행은 1904년 3월 15일 27명 가운데 한성재판소 관할 죄수 12명이다.
대한제국 사법 기록인 ‘사법품보’ 보고서 1904년 3월 17일자에 따르면 죄인 이름은 임복만, 차선익, 이치경과 최대유, 김학준, 한사수, 서윤명, 이보경, 김용근, 박천만, 천응택, 정용기 12명이다. 앞 세 명은 폭력을 동반한 상습 절도범이고 나머지는 떼강도다. 집행한 사람은 한성부재판소 검사 윤방현이고 보고를 받은 사람은 대한제국 법부대신 이지용이다.(‘사법품보(司法稟報)’(乙) 43책 56,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들은 3월 15일 밤 9시 한성감옥 교수대에서 처형되고 다음 날 그 시신들이 군중에게 공개 전시된 뒤 사람을 시켜 매장(使之出埋·사지출매)됐다(위 ‘사법품보’). 다른 교수형 죄수들은 ‘곧바로 매장(卽埋·즉매)’ 처리했지만 이들은 즉시 매장하지 않았다. 나무 기둥 부근에 이들을 운구해 온 지게들이 보인다.
하필이면 사흘 전인 1904년 3월 12일 대한제국 법부에서 ‘대낮에도 약탈과 살인이 비일비재하니 특별히 엄히 단속하고 처벌하라’는 특명이 전국에 떨어졌다(1904년 3월 12일 ‘훈령 13도6항1목재판소건’ 법부, 訓指起案(奎17277의5) 제11책. 도면회, ‘1895~1908년간 서울의 범죄 양상과 정부의 형사 정책’ ‘역사와 현실’74, 한국역사연구회, 2009, 재인용). 이 잡범 12명은 그 시범 케이스가 됐으리라 추정된다. 을사조약 1년 뒤 대한제국 외교는 물론 내치까지 실질적으로 장악해 버린 통감부는 ‘잔인하고 효과도 없는 공개 사형을 폐지하라’고 대한제국 법부에 권고하기도 했다(1906년 8월 26일 ‘황성신문’).
왜곡의 시작, 국사편찬위
원본 사진이든 당시 법률적 환경이든 사진 속에 처형된 사람들은 잡범들이다. 이들을 의병이라고 단정한 서울시와 해방 후 지금까지 의병으로 의심없이 주장해온 국사학계는 진실이 뭔지 살펴볼 의무가 있다. 해방 후 이 사진을 일본군에 의한 의병 처형장면이라고 처음 주장한 국가기관은 ‘국사편찬위원회’다. 국편위는 1966년 12월 ‘한국독립운동사2′ 단행본에 이 사진을 싣고 ‘1919년 3월 시가에서 학살되는 만세시위자’라고 설명했다. 사진 속 백립 차림 군중, 바이람의 여행 일정과 책이 나온 날짜를 비교해보면 1919년 만세운동과는 무관한 사진임에도 국사편찬위는 검증없이 3·1운동 희생자로 못을 박았다.
국편위 같은 책 같은 페이지에는 또 ‘1919년 3월 일군경에게 학살되는 만세시위자’라는 설명과 함께 조선인 3명이 총살당한 장면을 담은 사진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사진 또한 1919년이 아니라 프랑스잡지 ‘일뤼스트라시옹(L’illustration)’ 1907년 8월 10일자에 보도된 사진이다. 이 잡지 기사에는 총살형이 벌어진 장소가 ‘전라남도 담양’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군 만행임은 분명하지만 평화적 시위인 3·1 만세운동과는 무관하다.(1907년 8월 10일 ‘L’illustration’ pp.90, 94)
왜곡의 계보
1919년 3·1운동 직후 미국에서 활동한 구미위원부(한국위원회)가 ‘한국에서의 일본의 잔혹행위들’이라는 선전 문건에 이 사진을 삽입했다. 구미위원부는 ‘국제영화서비스(International Film Service)’라는 업체로부터 2달러 25센트에 구입했다고 밝혔다. 구미위원부는 ‘정당한 군사 작전’이라는 일본 정부 주장을 근거가 없다고 배척하고 이를 3·1운동 당시 만행이라고 주장했다.(’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구미위원부2 Ⅱ.선전문건류 2.필라델피아통신부·한국친우회 발행 문건 3)
국편위는 이를 시기나 사건에 대한 검증없이 1966년 책에 게재한 것이다. 그해 출판된 ‘경남독립운동소사’(변지섭, 삼협인쇄사, 1966년 10월)에도 이 사진과 위 강도 처형사진이 3·1운동 관련 만행으로 설명돼 있다. 임정 차원에서 면밀한 검증 절차 없이 이뤄진 선전물이 역사적 사실로 굳어진 계기다. 이후 ‘3·1운동 50주년 기념 논집’(동아일보사, 1969), 재일교포 학자 신기수의 ‘한일병합사(1987)’(눈빛, 2009, p63)를 비롯한 국내외 출판물에 이 집단처형사진이 의병 처형 장면으로 완전히 굳어버렸다. 특히 ‘한일병합사’는 오류가 일일이 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위한 과장 혹은 선동 작업 결과물이 지금까지 검증없이 역사적 사실로 단정되더니 마침내 강도와 절도범일지도 모를 인물을 영문도 모르고 추념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책임은 이제 누가 지는가. 이덕인 교수가 말한다. ‘아무리 목적이 정당해도 수단이 왜곡돼 있다면 그 사실의 정당성은 반감되거나 퇴색될 수밖에 없다.’ 투쟁도 선동도 사실(Fact)에 기반해야 승리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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