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규도 반했다, 세상 눈뜨게 한 시각장애 유튜버
하굣길 급습해온 失明
한순간 인생 변했지만
세상 바꾼 선한 영향력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시각 매체는 유튜브다. 유튜브 본사는 구독자가 10만명을 넘기면 해당 유튜버에게 ‘실버버튼’을 보내준다. 일종의 감사패다. 유튜버 김한솔(31)씨가 받은 실버버튼은 조금 독특하다. 점자(點字)로 돼 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 ‘점자 실버버튼’을 받은 시각장애인 유튜버, 채널명 ‘원샷한솔’. 절망은 원샷으로 해치우고, 당차게 전 세계를 누비며 새 잔을 채운다. 보이지 않던 세상의 편견과 문턱을 드러낸다. 구독자 82만명, 국내 최초 ‘점자 골드버튼’(100만명)이 멀지 않았다.
다만 ‘점자 실버버튼’은 엉망이었다. 처음 도착한 소포를 뜯어보니 아예 점자가 없었다. 유튜브에 문의하니 “미안하다”며 제작 업체를 연결해줬다. 업체와 수차례 메일을 주고받고서야 두 번째 실버버튼이 도착했다. 이번엔 황당한 오탈자(점자)가 발견됐다. 채널명도 틀렸고, ‘PRESENTED’가 ‘RESENTED’로 적혀 있었다. ‘선물’이 ‘분노’가 돼버린 것이다. 구독자들은 분개했다. 화들짝 놀란 유튜브 담당자가 실버버튼을 다시 보내왔다. 세 번째에야 겨우 제대로 된 감사패를 받은 일화는 시각장애인이 마주한 지난한 현실을 상기시킨다.
◇구독자가 세상을 바꾼다
–당황하셨겠어요.
“처음엔 ‘이거 뭐지?’ 싶었는데요, 팬들이 계속 반응을 주시니 반강제로라도 움직이게 됐어요. 혼자가 아닌 거죠. 나중엔 유튜브에서 점자 편지도 보내줬어요.”
–구독자의 힘인가요?
“정말로요. 댓글도 활발히 써주시고, 각종 기관에 이메일 수백 통씩 보내주신 덕에 세상이 바뀌었어요. 꾸준히 건의하면 그걸 받아들여 줄 사람이 있다는 걸 요새 많이 느껴요.”
‘원샷한솔’은 거창한 사회 담론을 들먹이는 채널이 아니다. 그저 편의점에 가거나, 버스를 타는 일상의 기록을 최대한 유쾌하게 담아내는 일상의 기록에 가깝다. 3년 전에는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이 평범한 영상에서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컵라면의 나라, 단 하나의 컵라면에도 점자 표기가 없었다. 제품명은커녕, 라면인지 짜장인지 비빔면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것이다.
–변화가 생겼죠?
“구독자분들이 영상을 첨부해서 삼양, 오뚜기 측에 요청을 넣었대요. 이제는 ‘매운맛’ ‘전자레인지에 돌리세요’ 같은 표기까지 들어가요. 얼마 전에는 화장품 회사 아모레퍼시픽에서 점자가 들어간 샴푸를 보내주시겠다고 연락도 왔고요.”
불편의 공론화 창구가 되면서, 원샷한솔은 전국적 호응을 얻었다. 한국관광공사 등 공공기관이나 한국P&G 같은 기업에서 강연 요청이 잇따른다. 여객기 안에 그의 강연 영상이 들어가 있고, 학교에서는 그의 유튜브 채널이 교육용으로 활용되고 있다. 지난 2월 원샷한솔은 디지털리터러시교육협회 주최 ‘청소년이 선정한 베스트 유튜브 채널’로 뽑혔다. 그는 농담처럼 “실명하고 출세했다”고 말했다.
◇눈 떠보니 앞이 안 보였다
크고 낙천적인 웃음, 그러나 따라 웃을 수는 없었다. 아홉 살 때 부모님이 갈라섰다. 열한 살 때 두 번째 어머니가 곁을 떠났다. 열두 살 때 세 번째 모친이 생겼다. 어머니가 바뀔 때마다 이사와 전학을 반복했다. 이듬해 부친이 세상을 떴다. 더 큰 사건이 소년을 기다렸다.
–언제였나요?
“2009년요. 고등학교 2학년, 하굣길 버스. 잠깐 졸다 눈을 떴는데 앞이 캄캄했어요. 깜짝 놀랐죠. 평생 안과랑은 거리가 멀었거든요. 큰 병원에 갔더니 단순한 시신경 염증이래요. 3~4개월쯤 지났나, 어느날 ‘수학의 정석’을 읽는데 갑자기 글자가 사라졌어요.”
결국 희소병 진단을 받았다. 레버시신경 위축증. 외국에서는 ‘시한폭탄’으로 곧잘 표현되는, 10~20대에 갑작스레 발병하는 질환이다. 하루아침에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2010년 11월 9일 복지카드가 발급됐다.
–공교롭게도 생일이었네요.
“다시 태어났구나. 앞이 안 보이는 삶이 시작됐구나. 아, 이제 한 살이다.”
–현실이 받아들여지던가요.
“한 달 뒤부터 점자를 배웠는데요, 계속 혼란스러웠어요. 이게 맞나, 이렇게 살아야 하나…. 스무 살에 한빛맹학교 입학하고서야 현실 감각이 생겼어요. 앞으로는 확실하게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
친구들이 대학에 가던 해, 그는 다시 고등학생이 됐다. 어둡지만 움직일 수 있었다. 감각이 아직 네 개 남아 있었다. 맹학교에서 전교회장을 맡았다. 손으로 만지고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다. “직업 선택의 폭이 좁아요. 안마사, 사회복지사, 공무원 정도죠. 오기가 생기기도 했고, 뭔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어요.” 2015년 건국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선택은 옳았나요?
“한 학기 다니고 바로 휴학했어요. 점자 교재가 없으니 따로 제작을 해야 했고, 수강신청부터 시험까지 쉬운 게 하나도 없었죠. 대학에 공부하러 온 건지, 부탁하러 온 건지 헷갈릴 정도로요. 기숙사에 틀어박혀 고뇌를 반복했어요. 복학하면 무조건 새로운 걸 하자, 아니면 대학 온 의미가 없다.”
–뭘 시작했나요?
“교내에 장애인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보고서를 써서 학교에 내고, 학생회 친구들도 만나고, 피켓도 들어보고…. 학교에 점자 블록이 깔리고, 횡단보도에 음성 안내기가 설치됐어요.”
–춤도 추셨죠.
“안무가 안은미 선생님이 ‘안심(安心) 땐스’라는 공연을 기획하셨어요. 시각장애인의 움직임을 춤으로 풀어낸 거예요. ‘얘들아 일루 와봐, 난 눈썹도 없다, 그냥 아무렇게나 춰봐.’ 선생님이 그러니까 다들 쭈뼛쭈뼛하다가 춤을 추더라고요. 매일 하니까 자연스레 몸짓이 되더라고요. 움직이면서 진짜 ‘하면 된다’를 깨닫게 된거죠. 2017년에는 프랑스·독일에서도 공연하고 왔어요.”
◇개그맨 이경규, 러브콜 보낸 이유?
2019년 미국에 갔다. 한 시중은행이 후원하는 해외 탐방 프로그램에 선발된 것이다. “친구들과 취업 얘기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 ‘우린 더 힘들겠다’였어요. 그래서 미국이 궁금했어요. 장애인의 직업적인 다양성 보장이 잘돼 있다고 해서요. 8박 10일 뉴욕 여행하면서 월가(街)에서 일하는 한국인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도 만났죠. 이곳 장애인들의 공통점을 하나 알게 됐어요.”
–그게 뭔가요?
“자신감요. 어딜 가나 차별은 있겠지만, 그래도 나라든 회사든 방법을 찾아주더라고요. 그러니 태도가 바뀌는 거예요. 못 할 게 뭐 있어?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갔는데, 안내인이 시각장애인이었어요. 수천 년 된 유물을 시각장애인’만’ 만질 수 있어요. 우와, 이곳을 나도 즐길 수가 있네?”
귀국 한 달 뒤 유튜브 계정을 만들었다. 재밌는 걸 하고 싶었다. 장애인을 다루는 매체는 뉴스 아니면 다큐멘터리였으니까. 그 안에서 장애인은 심각하고 불쌍한 존재여야만 했다. “장애인 관련 TV 프로그램에 여러 번 출연했어요. 버스 타서 교통카드 찍으면 PD가 ‘조금 더 애타게 허우적거려 달라’고 요구하는 식이에요. 그래야 한대요.”
–그래서 유쾌한 유튜버가 됐군요.
“어머니도 여럿이었고, 순탄하지 않았잖아요. ‘즐겁게 살자’로 자기 세뇌가 됐어요.”
–개그맨 이경규 소속사에 합류했죠?
“2022년 KBS 예능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에너지가 좋다’면서 같이 일해보자고 하셨어요. 연예인들도 자주 초대해서 ‘장애=마이너’라는 편견을 깨고 싶었어요.”
이경규도 종종 출연한다. “(원샷한솔이) 명랑하고 철딱서니가 없어 보여 좋았다”고 했다. 열세 살부터 기초생활수급자였던 청년은 유튜브 수익 창출로 17년 만에 수급자 신분에서 벗어났다. 부서진 기타를 10년 넘게 치던 큰아빠, 그가 열네 살 때 입던 옷을 지금도 입으며 묵묵히 뒷바라지한 큰엄마에게 ‘아들’은 비로소 새 기타와 루이비통 백을 사드릴 수 있었다.
◇아직도 바꿀 게 너무 많다
인터뷰를 하면서 다시 보게 됐다. 서울 시내 길바닥의 점자 블록이 얼마나 자주 끊기는지. 버스가 얼마나 난폭하게 출발하는지. 무인점포 키오스크는 얼마나 절망적인 벽인지. 잠시만 눈을 감아 보시라. 횡단보도에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오세훈 시장도 출연했죠?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작년에 건국대 인근을 같이 걸었어요. 신호등 음성 안내 기능이 고장 나서 몇 번이나 신호를 놓쳤죠. 놀라시더라고요. 이런 데가 많으냐고. 카페 가서 키오스크로 주문도 해보고. 결국 안대 벗고 주문하셨어요.”
–그 후 뭐가 바뀌었나요?
“진짜 놀란 게요, 바로 그다음 주에 공사하더라고요. 이렇게 빨리도 되네?”
주한미국대사관 교류 프로그램으로 지난해 미국에 다녀왔다. “시카고에서는 버스 기사분이 이 버스가 몇 번 버스인지, 행선지가 어디인지 먼저 알려줘요. 워싱턴 DC에는 버스정류장에도 점자가 있더라고요.” 지팡이를 들고 있으면, 버스가 차체를 낮춘다. 닐링 버스(Kneeling Bus). 시각장애인을 위해 대중교통이 무릎을 꿇는 것이다. 이걸 영상에 담았다.
–인상 깊은 말이 있었다고요.
“한국에선 항상 마음이 쫓겨요. ‘빨리 내려야 하는데…’ 조마조마하고요. 근데 미국에서는 ‘Take your time’이라고 말해주더라고요. 내 속도를 인정받는 느낌. 욕먹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할 일이 아직 많죠?
“뵈는 게 없으니까 더 자신감 있게 하려고요. 그때 봐둘 걸, 그때 해볼 걸, 이런 후회 더는 안 하려고요.”
유튜버로 변신한 지 올해로 5년. 억울하고 막막했던 인생의 격변을 통과하며, 그는 이제 핸드폰을 분실해도 초연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눈도 잃었는데 겨우 그거 잃었다고 내가 힘들어할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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