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잘 늙은 절 한 채, 꽃비 내린다[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꽃비 내리는 화암사
그중에서 현호색이란 낯선 이름의 야생화가 눈길을 끈다. 꽃 이름을 검색해 보니 라틴어 학명 코리달리스(corydalis)는 종달새라는 뜻이라고 한다. ‘왜 종달새를 닮았다는 거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됐다. 꿀주머니 끝부분이 새의 얼굴이고, 벌어진 꽃잎은 꽁지 부분이라고 생각하니 영락없는 종달새 모양이었다. 어린 새가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 같기도 하고, 봄날 청보리밭 위로 날아다니는 종달새 합창단이 지지배배 노래하고 있는 듯했다.
계곡 끝에 불명산 화암사(佛明山 花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우화루(雨花樓)가 나타난다. 강원 고성에 있는 금강산 화암사는 벼 화(禾) 자를 쓴 ‘화암사(禾巖寺)’다. 절 뒷산에 벼를 베어 볏단을 차곡차곡 쌓은 모양의 바위(禾巖)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완주 화암사는 꽃바위(花巖)가 있나 보다. 화암사 정문에 서 있는 우화루는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하늘에서 흰 연꽃, 붉은 연꽃이 우화(꽃비)처럼 내렸다는 불경 말씀에서 연유한 이름이다. 우화루 2층 누각에는 창문이 나 있는데, 마침 비가 내려 창밖 나무에서 꽃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다.
안도현 시인은 ‘화암사 내 사랑’이라는 시에서 ‘잘 늙은 절 한 채’라고 화암사를 표현했다. 적묵당(寂默堂) 마루에 앉아 네모진 마당을 바라보며 이 절이 늙어간 세월을 헤아려 본다. 안 시인은 마지막 구절에서는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로 끝맺었다. 어딘가에 숨겨두고 나 혼자만 가끔 찾아오고 싶은 절이란 뜻이리라.
●역사와 문화가 만나는 길
루프톱에 올라가 보니 실제 360도 방향으로 호남평야가 펼쳐진다. 완주 만경강 유역뿐 아니라 전주와 익산 도심 풍경, 정읍 갈재와 부안 내변산, 새만금 일원까지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완주 마한 유적과 익산 왕궁리 유적, 동학 삼례광장 같은 역사 유적지도 펼쳐진다.
지역마다 랜드마크 전망대를 세우는 게 유행이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펼쳐진 지평선 위로 지는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창가에는 경치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고 중앙무대 계단식 좌석에서는 100명이 둘러앉아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 완주군은 수백억 원을 들여 랜드마크를 짓는 대신 이미 국내 대학 건물로는 최고 높이인 우석대 대학본부 옥상을 전망 시설로 변신시켰다. 지방자치단체와 대학이 관광을 위해 협력한 좋은 사례다.
전망대에서 봤던 모악산을 찾아가 봤다. 완주 전주 김제의 경계를 이루는 모악산은 봄 풍경이 아름다운 산이다. 정상에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형상의 바위가 있어 모악(母岳)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모악산 자락에 있는 구이면 안덕건강힐링체험마을에서는 한방 진료와 쑥뜸 치료, 24시간 운영되는 황토 한증막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한증막 주변 산책로에는 ‘옛 금광굴’이 있다. 한여름에도 시원한 공기를 유지하기 때문에 특별한 피서지로 꼽힌다.
소양면 오성한옥마을은 50가구 집 23채가 한옥과 고택(古宅)으로 이뤄져 있다. 아원고택과 오성제 저수지 소나무 등은 방탄소년단(BTS)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해 외국인 관광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주 한옥마을이 지나치게 상업화된 반면, 오성한옥마을은 주변 산세와 돌담, 정원이 잘 어우러져 좀 더 아늑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다. 이 마을 한옥들은 대부분 철거 위기에 있는 100∼150년 된 고택을 옮겨 와서 조성했다.
●레몬꽃 향기 속으로
이탈리아 작곡가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시칠리아 섬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오페라 도입부에는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라는 합창곡이 나온다. ‘오렌지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종달새는 숲속에서 노래한다/오, 빛나는 눈동자의 소녀들아/새들도 짝을 찾아 날아가듯/우리도 그대들에게로 날아간다.’
본앤하이리는 완주에서 3대째 농사를 짓는 모자(母子)와 지역 청년 5명이 함께 운영하는 농장이다. 하이리에서 나고(Born) 자란 농부가 만든 완주 로컬푸드라는 의미에서 붙인 브랜드. 단호박 농사를 짓다가 5년 전부터 제주에서 들여온 레몬, 한라봉 같은 만감류(晩柑類) 농사를 짓고 있다.
사무장을 맡고 있는 아들 황인재 씨(26)는 레몬 농사와 밀 농사를 지으며 직접 수확한 밀로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빵을 굽고 레몬청을 만든다. 카페에서 빵과 레모네이드를 주문하면 밀밭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2층이나 레몬꽃 향기가 물씬한 온실 내부 테이블에서 먹을 수 있다.
완주=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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