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독립운동 대부…그의 집에서 안중근 단지동맹 맺어

2024. 4. 13.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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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인물 탐구 ③ 최재형
연해주는 헤이룽강, 우수리강, 동해로 둘러싸인 땅이다. 러시아 85개 연방지역의 하나로 우리나라 1.6배 크기다. 북방민족이 세운 금·원·청이 차례로 지배했고, 1860년 러시아가 베이징조약으로 차지했다. 한민족과도 뗄 수 없는 역사가 전개된 곳으로 고조선을 이은 고구려·발해 그리고 이와 연결된 북방민족국가의 영역이었다. 1863년 이래 두만강 건너 한인 이주가 계속되면서 집단거주지 ‘한인촌’이 세워졌고, 1910년 전후로는 애국지사의 망명과 이주가 줄을 이으면서 만주와 함께 조직적인 항일운동의 거점이 됐다. 최재형 선생은 바로 이곳에서 항일독립운동의 대부로서 역할을 하다 순국했다.

난로 뜻하는 ‘최 페치카’ 애칭 얻기도

최재형 선생은 가난한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이국땅에서 평생 모은 재산을 항일투쟁과 동포지원활동에 바쳤다. 사진은 1915년에 촬영한 선생의 모습. [사진 최재형기념사업회]
1860년 함경도 북단의 경원에서 가난한 농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선생은 9살에 가족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 한인들이 세운 지신허(地新墟)마을에 정착했다. 12살 어린 나이에 가정 사정으로 가출해 포시예트항에서 탈진해 쓰러졌고 러시아상선 선원에 의해 구조돼 보살핌을 받는다. 선장 이름을 따라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라는 이름도 얻었다. 선장 부인에게서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폭넓게 배우고, 페트로그라드로 대양을 항해하며 여러 나라의 문물을 접한다. 6년간의 선원 생활 후 1878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사에서 3년간 더 일하면서 돈을 모은 후 부친이 있는 지신허 서쪽 14㎞ 떨어진 연추(煙秋)로 돌아와 농장 일을 했다. 연추는 발해의 무역항 염주성이 있었던 크라스키노와 인접한 한인마을이다.

1884년 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만강 하구까지 군용도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연추 등지의 많은 한인들이 동원됐다. 이때 러시아어가 유창한 선생은 통역으로 선발되어 한인들의 어려운 입장을 앞장서 대변해 큰 도움을 준다. 이로 인해 ‘최 페치카’라는 애칭을 얻게 되는데, 추운 시베리아에서 ‘난로’를 뜻하는 페치카는 따뜻함의 상징이다. 도로건설 과정에서 러시아 황제로부터 훈장을 받고 군·관의 신뢰를 얻은 선생은 군대에 소고기 등 식자재·건축자재를 납품하면서 큰 부를 쌓았다. 이후 러·일전쟁 등을 계기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동포사회를 지원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연추에 자치제를 허용하고 읍장(邑長)에 해당하는 도헌(都憲)을 두었는데, 선생은 1893년 한인 최초로 도헌에 임명되면서 한인사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모두 5개의 훈장을 받은 그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의 공식행사에 대표로 참석하는 등 러시아 당국의 신망을 얻었다. 도헌 시절 선생은 한인자녀 교육활동에 정열을 쏟았다. 연추에 교회와 학교를 건립하고 자신의 봉급과 재산을 장학금으로 내놨으며 연해주 지역 한인마을에 많은 소학교를 설립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고 직접 지원했다.

선생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집. 2019년 ‘최재형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연합뉴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러시아 해군 통역장교로 참전했고, 전후 박영효의 요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위기에 놓인 조국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에 나서게 된다. 1907년 선생과 이범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조직했고 그 해에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을 만난다. 1908년 선생은 이위종과 함께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해 연추의 자택에서 이범윤·이위종·안중근 등과 함께 최초의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총장에 선임됐다. 동의회 취지서는 ‘만약 조국이 멸망하고 형제가 없어지면 우리는 뿌리 없는 부평이라 다시 어디로 돌아가겠는가’라고 쓰고 있다. 동의회 의병부대는 연해주 최남단인 하산에서 두만강을 건너 우영장(右營將)인 안중근 등의 지휘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선생은 안중근 의사 거사의 막후 후원자이기도 하다. 선생의 집은 독립운동의 아지트였으며 안 의사가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맹세한 단지동맹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자금과 권총을 구해주고, 거사 후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 받도록 국제변호사를 선임했으나 일본 법정에서 불법재판 끝에 안 의사는 순국한다. 그 후 선생은 안 의사의 가족들을 보호해준다.

치열했던 의병활동이 일본의 집요한 압박과 러시아의 정책변화로 한계에 직면하자 선생은 갈등 끝에 이범윤과 결별하고 언론·교육·계몽활동으로 국권회복 운동에 나선다. 1909년 ‘대동공보’ ‘대양보’ 등 신문사를 인수·운영하면서 한인계몽과 항일사상 고취, 일제침략만행규탄 등의 활동을 전개한다. 국권상실 후 1911년 말 신한촌에서 한인 경제활동과 교육을 장려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가 설립됐으며 선생은 총재-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발하게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권업회는 이후 러시아 한인의 대표 항일단체인 ‘전로(全露)한족회중앙총회’로, 이어서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관계로 발전하면서 연해주 항일운동은 큰 타격을 받는다. 이후 일제의 사주로 선생은 러시아 당국에 체포되는 등 위기를 겪지만 1917년 러시아혁명 후에는 연해주 민족지도자로 자리 잡았고, 1918년에는 이동휘와 함께 ‘한족대표자회의’ 명예회장에 추대되었다. 이듬해 블라디보스토크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최초의 임시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해 외교부장으로 선출됐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됐지만 사퇴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대한국민의회와 상해임정의 노선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 순국 103년 만에 부인과 현충원 안장

2023년 서울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최재형 지사와 부인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 여사의 영현이 봉송되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혁명 후 1918년 일본은 시베리아 출정을 단행했고, 1920년 4월 일본인 학살을 빌미로 러시아 적위군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촌, 우수리스크 등지의 수백 명 한인들을 습격해 대대적인 체포·고문·학살을 자행했으니 바로 ‘4월 참변’이다.

독립운동의 거두로 일제의 표적이 된 선생은 우수리스크의 자택에서 도피하라는 가족의 권유에도 “만약 내가 숨는다면, 일본인들이 잔인하게 너희에게 복수할 것이다. 나는 이미 늙었고 너희들은 더 살아가야하니 나 혼자 죽는 편이 더 낫다”라고 오히려 가족을 설득했다. 그해 4월 5일 아침 선생은 일본군에 체포되고 재판 없이 총살되면서 60세 나이로 순국한다. 상해임시정부에서는 선생과 순국 인사들을 위한 추모회가 개최됐고, 1921년 상해임시정부 대표단은 우스리스크를 방문해 부인과 자녀들을 위로했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2011년 최재형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우수리스크는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으로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이였고 2009년 고려인문화센터가 개관했다. 지금도 고려인들은 ‘최 페치카’를 알고 있다. 선생이 마지막 거주했던 주택은 2019년 최재형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선생은 4남7녀를 두었고 아들과 딸이 회고록을 남겼다. 선생의 유해는 행방을 알 수 없고, 2023년 8월 순국 103년 만에 키르기스스탄의 묘지에 있던 부인의 유해를 모셔와 국립현충원에 합장 묘역을 마련했다.

선생은 가난한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이국땅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를 쌓았으나 평생 모은 재산을 항일투쟁과 동포지원활동에 쾌척하고 항일운동에 나섰다. 동포애와 나라사랑의 일념으로 성공한 인생을 동포와 조국에 모두 바친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은 한민족사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2007~2008년 재정경제부 제1차관을 거쳐, 2011~2013년 금융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다. 현재 지평인문사회연구소 대표로 있다. 지은 책으로는 『김석동의 한민족 DNA를 찾아서』가 있으며, 오랜 경제전문가로서 직장인들의 팍팍한 주머니 사정을 감안해 가성비 좋은 서울의 노포 맛집을 소개한 『한 끼 식사의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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