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이 만든, 이토록 완벽한 흑백

서정민 2024. 4. 13.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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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사진전 여는 마르친 리체크
흑백 대비가 완벽한 작품 ‘눈 속에서 백조에게 먹이를 주는 남자’(2013년). [사진 마르친 리체크]
‘완벽한 순간’이라는 게 과연 있을까. 누군가는 ‘대충 지금’이 완벽한 순간이라 자위할 테고, 또 누군가는 ‘그런 것은 없다’며 시간을 흘려버릴 것이다. 이처럼 ‘완벽한 순간’에 대한 정의는 저마다 다른데, 폴란드 사진가 마르친 리체크의 사진 ‘눈 속에서 백조에게 먹이를 주는 남자’ 앞에서는 누구나 발길을 멈추게 된다. 그림자와 빛, 흰 눈과 남자의 어두운 실루엣, 검은 강과 흰 백조…이렇게 완벽하게 흑과 백이 대비되는 순간을 그림도 아닌 사진으로 잡아내다니.

오는 5월 24일까지 서울 중구 수하동의 KF갤러리에서 열리는 ‘조화: 마르친 리체크 사진전’의 주인공 마르친 리체크는 ‘더 가디언’ ‘텔레그래프’ ‘내셔널 지오그래프’ 등 세계 유수 매체들에 작품이 소개되며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사진가다.

그의 대표작인 ‘눈 속에서 백조에게 먹이를 주는 남자’는 권위 있는 국제 사진상 중 하나인 ‘국제순수예술사진상’에서 2013년 최고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사진을 찍을 당시 그는 개인적으로 매우 우울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집 근처 비스툴라 강변을 매일 아침 산책하면서 안개 속 같은 머릿속을 정리하려고 노력할 때였죠. 어느 날 아침 7시 브로츠와프 다리를 건너면서 강변 풍경에 발길을 멈췄죠. 자연이 무심히 만들어 낸 하얀 눈과 검은 강이 직선으로 대비된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어두움과 밝음, 음과 양’이 결국 서로를 보완하고 있음을 깨달았죠. 고난 속에서 긍정의 중요성을 깨닫는 게 인생이구나 알게 된 순간이죠.”

이후 그는 나흘간 매일 같은 시간에 다리 위로 나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날 한 남자가 백조들에게 먹이를 주는 순간, 정확하게 네 번의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카메라에 담긴 네 컷 중 하나는 내가 상상했던 장면일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갠지스강에서 촬영한 ‘이주-합중국Ⅱ’(2016년). [사진 마르친 리체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주제로 한 리체크의 사진들은 기하학적인 요소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미니멀한 사진으로 유명하다. 자연 혹은 인공적인 조형물이 만들어 낸 단순한 선들이 인간과 결합한 풍경은 이보다 더 정교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는데, 작가는 그 안에 비움과 채움이라는 철학적 상징성까지 보탠다. 일부러 연출하지 않고 어떻게 이런 순간들을 잡아낼까 신기할 뿐인데, 작가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기다림이죠.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네모난 풍경이 있어요. 저 안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다, 이 배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좋겠다 상상하면서 마냥 기다리는 거죠.”

2016년 인도에서 촬영한 ‘이주-합중국Ⅱ’ 사진은 갠지스강의 빨간색과 흰색 계단에서 촬영한 것인데, 당시 그는 배를 타고 강변의 계단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단이 성조기 같다고 생각한 순간, 트럼프 대통령의 멕시코 장벽이 떠올랐어요. 이 풍경 안에 뭐가 더해지면 내 생각이 더 완벽하게 표현될까 기다리던 찰나에 어떤 여자가 빨래를 말리려고 파란색 큰 천을 펼쳤고, 큰 가방을 여러 개 짊어진 남자가 지나갔죠.” 어떤 것도 작가가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진은 이민자들의 슬픈 ‘아메리칸 드림’을 떠올리게 한다. “상상한 대로 그림이 안 잡힐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장면이 잡히기도 하죠. 그럴 때면 신에게서 선물을 받은 느낌이 들어요.”

‘미니멀리즘과 상징적 은유’를 키워드로 작업하는 이유를 그는 “명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여러 나라, 특히 상징적 은유가 많은 아시아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신과 인간, 자연과 인간, 죽음과 삶 등 답이 없는 질문의 답을 찾고 있어요. 사진 안에 여백을 많이 두는 것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면서 그 빈 공간에 저마다 자신의 작은 우주를 상상하고 채우길 바라기 때문이죠.”

‘삶의 색’ ‘연결’ ‘경계 너머’ 등 추상적인 제목이 붙은 35점의 전시 작품들을 통해 저마다의 명상에 빠져보시길.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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