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노조의 '한석호 구하기'는 틀렸다

안명희 언론노조 중앙집행위원·출판노조협의회 의장 2024. 4. 13.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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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미디어오늘 안명희 언론노조 중앙집행위원·출판노조협의회 의장]

▲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 연합뉴스

진영대결을 하자는 게 아니다

지난 3월 조선일보는 전태일재단과 창간 104주년 공동기획 '12대 88의 사회를 넘자'를 연재했다. 실은 현장에서는 이미 준비단계에서 알고 있던 바였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한국노총에서도 서울시에서도 프리랜서 보호를 운운하며 현장 접촉을 해왔던 터라 조선일보라고 해서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다만 고민은 되었다. 프리랜서 노동에 대한 접근도 진단도 방안도 마뜩잖아 관망만 해왔는데, 이제는 정말 노조의 본격적인 문제 제기가 필요한 건 아닐까, 노조의 현장 투쟁을 부정하는 해법이 마치 최선인 양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언론노조가, 윤창현 위원장이, 적극적으로 '한석호 구하기'를 하고 있기에 모른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왜냐하면 오는 4월25일 '2024 전국언론노동조합 확대간부수련회'에 한석호 전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의 “나는 왜 조선일보와 비정규직을 얘기했나”라는 강의가 잡혔기 때문이다. 윤창현 위원장은 “한 전 사무총장에 대한 비판과 비토가 민주노총과 노동시민사회의 주를 이루지만, 정반대의 평가와 시각도 분명한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며, 당사자와의 토론을 통해 언론노조가 마주한 여러 현안에 대해 폭넓은 시각과 문제의식을 확장하는 자양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진영대결을 하자는 게 아니다. 한석호 전 사무총장 개인의 거취 문제에 천착할 의도도 없다. 그저 거대한 투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작은 노조와 미조직 불안정 노동자들로서는 윤석열 정부가 노동시장 이중구조론을 펼치며 임금 및 노동시간 제도를 개편하기 위해 여론화 작업을 하는 것이 몹시 우려가 되며, 프리랜서 노동 관련하여 조선일보의 지면을 통해 내놓은 '전태일재단의 제안'은 현장 투쟁 없이는 현실 가능성이 없다는 지적을 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보다 투쟁하지 않는 언론노조×한석호식 방송 비정규직 사업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해야 한다고 계속해 제안하고 있을 뿐이다.

전태일재단의 제안, 현장 투쟁 없이는 불가능하다

조선일보 연재기사 “노동법 밖의 노동자, 프리랜서 400만 명”에서 전태일재단은 우선 프리랜서 경력 인증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경력을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더 나은 보수를 받을 수 있고, 능력에 따라 실질 임금을 높일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소기업중앙회, 한국디자인산업연합회, 한국소프트웨어산업연합회 등을 예로 들며, 직종별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사회적 합의를 통해 분야별 최저임금으로 볼 수 있는 시중노임단가를 정해보자고 했다. 또한 프리랜서에 대한 임금 체불 문제가 잦은 만큼 에스크로(Escrow) 계좌 도입도 논의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명절 때 프리랜서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배려 문화도 자리 잡길 바란다고 했다.

▲ 조선일보 연재기사 '노동법 밖의 노동자, 프리랜서 400만 명'

그런데 '전태일재단의 제안'에서는 여타 비정규직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프리랜서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가장 핵심인 사용자 책임을 묻는 것은 빠져 있다. 사업주와 프리랜서 간 권력 관계를 살피지 않고, '나눔과 상생'이라는 결과적으로 사용자의 시혜 없이는 불가능한 제안들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진정 전태일재단의 제안을 현실화하려면 노조의 투쟁이 배치되어야 한다. 현장을 바꿔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투쟁이 목표가 아니라, 투쟁이 강력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현재 출판노조(언론노조 출판노조협의회)가 처한 상황이 그 분명한 사례다.

조선일보는 한국노총-한국플랫폼프리랜서노동공제회의 자료를 인용해 임금 체불 프리랜서 비율을 보여주었다. 번역, 출판, 디자인 등도 포함되어 있는데, 맞다. 출판분야 외주·프리랜서 임금 체불 문제는 너무도 심각하다. 2024년 1월 문화체육관광부-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발표한 '출판 외주노동자 근로환경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 요구'에 따르면, 외주노동자들 대다수가 작업단가 책정기준은 경력이나 성과보다는 업계의 관행 또는 출판사 자체 기준이라고 응답했다. 20년이 지나도 작업단가의 변함이 없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니 '2023년 출판노동 요구안 설문 결과'에서 외주노동자들의 요구가 첫째 적정한 작업 단가(95.1%), 둘째 작업비 지연/체불 금지(69.6%)인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출판노조는 2022년 12월 국회토론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1년 이상을 끊임없이 출판사용자단체인 출협(대한출판문화협회)에 교섭을 요구해왔다. 그러나 출협은 교섭은커녕 출판노조와의 만남조차 거부하고 있는 상태다. 출판노조가 출협에 논의하자고 제안하는 내용은 무엇이겠는가? 바로 경력 인증을 위해 출판권 면에 책 작업을 한 외주/프리랜서 노동자를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며, 최저 작업단가를 정하고, 경력과 능력을 반영하여 작업비가 책정될 수 있도록 하며, 작업비 체불시 문체부의 지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는 것 등이다. 그런데 사용자의 거부로 논의 테이블이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니 작년 10월 출협이 주최하고 문체부가 후원하는 '책의 날' 기념식에서 출판노조는 기습적으로 단상에 올라 피켓 시위를 벌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일보와 전태일재단이 말하는 나눔과 상생은 이렇게 현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투쟁하지 않는, 언론노조×한석호식 방송 비정규직 사업

프리랜서가 노동법 밖에 있어서 그 어떤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게 맞다. 그렇다면 프리랜서를 노동자로 인정하고, 노동법을 적용하면 될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제아무리 그럴싸한 프리랜서 보호안을 가지고 와도 어차피 사용자가 책임을 회피하면 안 될 일이다. '무늬만 프리랜서'의 대표격인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방송사가 프리랜서라고 주장하길래 법률투쟁을 통해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왔더니, 이제는 근로계약서를 작성할 수 없다고 버티거나 새로운 직군을 만들어 배치해버리는 등의 악랄한 수법을 쓰고 있어서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매번 다시 시작된다. 그런데도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언론노조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3월28일 언론노조는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보고를 통해 한석호 전 사무총장의 강의를 통과시켰고, 안건으로 미디어노동공제기금 신설에 대해 논의했다. 언론노조는 이렇게 '한석호 구하기'에만 열심이었을 뿐, 정작 방송 비정규직 투쟁 관련한 모든 보고와 안건은 '삭제'했다. ubc울산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제기한 정규직 노조 간부의 문제, 고 이재학피디 투쟁 이후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엔딩크레딧과의 공식 면담, 대의원회 당일 뿌려졌던 정규직 노조의 방송 비정규직 노조 가입 거부와 투쟁 방해에 대해 언론노조의 결단을 바랐던 조합원·활동가·시민 472명의 연서명, 이에 “언론노조에 대한 비판을 겸허히 수용합니다”라는 언론노조의 공식 사과까지 이 모두가 중집 보고와 논의 자료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3년간 언론노조는 한석호식 비정규직 사업인 '노동공제연합 풀빵'과 함께하는 미디어공제회 출범과 미디어연대지부 설립을 위해 차곡차곡 활동을 쌓아왔고, 이를 언론노조의 대표적인 방송 비정규직 사업의 성과로 꼽는다. 이는 방송 비정규직 투쟁 관련 공식 사과문에서도 언급될 정도다. 그런데 다른 산별노조가 미조직 비정규직 전략조직사업에 대한 평가 토론회를 수시로 진행하는 데 반해, 언론노조는 이 사업들에 대한 다면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 적어도 “미디어노동공제회의 지속 가능한 사업 집행을 위해 안정적인 재원이 필요”하여 “미디어노동공제기금 신설”을 논의하고자 한다면, 결정에 앞서 공개적인 제대로 된 내외부 평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론노조는 분명한 평가를 통한 사업 집행을 밟지 않는다.

사실, 미디어공제회를 통해 미디어 불안정 노동자를 조직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미디어공제회 사업은 미조직 비정규직 전략조직사업이 아니라, 방송작가지부 조합원에 대한 생계대출사업으로 봐도 무방하다. 앞서 조선일보-전태일재단의 제안에서 프리랜서에 대한 명절 선물이 언급되었는데, 이게 바로 공제회 사업인 것이다. 진짜 문제는 미디어연대지부다. 사업장을 넘어 부유하는 미디어 노동자들을 공제회 가입 연결을 통해 노조로 묶어내겠다고 했던 미디어연대지부는 정작 사업장에서 정규직 노조 가입을 거부당한, 투쟁하는 방송 비정규직 당사자에게 언론노조가 내놓는 카드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결과적으로 미디어연대지부는 방송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을 분리해내는 데 충실히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론노조×한석호식 방송 비정규직 사업의 실제다. 그러니 애초부터 언론노조에 방송 비정규직 투쟁을 기대한 것이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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