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아버지의 ‘살갗’으로부터
그때부터 렌즈를 사이에 두고, 아들의 시선이 아버지를 향했다. 돋보기를 쓰고 책 속에 깊이 묻힌 봄날의 아버지, 거친 수렁을 톱과 쇠스랑으로 일궈 논을 만드는 여름날의 아버지, 그 논에서 쌀을 수확해 가을볕에 말리는 아버지, 낡은 지게로 땔나무를 지어 날라 장작불을 지피는 한겨울의 아버지…. 아버지가 강원도 화천의 산골 집을 벗어나 제주도로 향할 때면, 카메라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강정마을에서 깃발을 높이 들고 투쟁하는 아버지, 희생자들의 이름이 끝없이 새겨진 제주 4·3 평화공원의 각명비 앞에서 눈물짓는 아버지를 사진에 담았다.
1944년 제주도 하귀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가족과 친척,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죽어간 제주 4·3을 영문도 모른 채 겪었다. 허겁지겁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한라산 자락으로 피난 갔던 유년의 기억은, 청년이 되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산골의 늙은 촌부가 된 아버지를 끝내 따라다녔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버지이면서 농부로, 제주 4·3 진상규명운동과 평화활동가로 쉼 없이 여러 면면의 자신을 담금질하며 살아간다.
아들 김일목이 제주 4·3의 피해자인 아버지의 일상을 담담히 기록한 ‘나를 품은 살갗’은, 2020년 사진가들이 주는 사진상인 ‘온빛다큐멘터리’ 신진사진가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를 객관적으로 기록함과 동시에 사라진 지난 역사를 비주얼스토리로 시각화했다는 점에서 평단으로 참여한 다큐멘터리사진가들로부터 높은 평을 받았다.
톺아보면, 제주 4·3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럴 수 있게 되자, 다양한 시선과 형식으로 사진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제주 4·3이라는 큰 역사를 이야기하는 ‘나를 품은 살갗’은, 열일곱 살 소년의 눈에 비친 ‘늙고 처진 아버지의 살갗’이 우리에게 준 예기치 못한 선물이다.
박미경 류가헌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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