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꽃길 내일은 얼음길, 유라시아 대륙 여섯번 횡단
서산 부석사 벚꽃 찾은 탐험가 김현국
이렇게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지속하는 건, 그 꽃 때문이다. 벚꽃. 야하다고 하면 ‘불순하다’는 핀잔을 듣고, 순결하다면 ‘그렇게까지?’라는 반문을 받게 하는 꽃. 게다가 핌이 화려하면서, 짐이 애처롭기도 하니 양면의 ‘마력’을 품은 꽃이다.
벚꽃이 대단할 이즈음에, 수수한 절을 찾았다. 충남 서산시 부석사에는 벚꽃의 고즈넉함이 피어났다. 사찰 관계자가 밝힌 ‘벚꽃 중에도 왕벚나무꽃’이 이번 주말 절정을 고하고 있었다.
“벚꽃은 설렘으로 시작 고요로 들어가”
“벚꽃이 구름처럼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다.”
탐험가 김현국(56)씨가 비탈 따라 솟아있는 운거루(雲居樓)에서 벚꽃 속으로 시선을 묻고 있었다. “벚꽃은 온갖 감정을 불러내요. 설렘으로 시작해서 고요로 들어가게 해요. 제 탐험처럼 말입니다.” 봄의 생동을 알리면서 사방연속무늬 같은 꽃들의 운집이 마음을 단순하게 만든다는 말일 게다. 벚꽃의 여러 꽃말 중 절세미인·매혹·순결 등을 아우른 뜻이기도 하다.
지난해 5월, 김씨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꽃인 벚꽃이 지자마자 시베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찍고 되돌아왔다. 장장 3만5000㎞의 대장정을 마친 11월 하순, 벚나무가 낙엽을 떨구고 있었다.
운거루에서 벗어나 돌계단을 밟았다. 부석사는 도비산(352m) 비탈에 들어섰다. 억지로 비탈을 깎아 세우지 않아, 사찰이 산보다 먼저 생긴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비탈에는 지금 자주광대나물 천지다. 꿩의바람꽃·노루귀 등 봄꽃도 볼 수 있다. 전각 규모는 소란스럽지 않다. 김씨가 “사찰이 참 소박하다”고 말한 이유다.
Q : 이런 소박한 절을 찾는 이유가 있나요.
A : “제 기질이 야단법석이니까요(웃음). 좀 가라앉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Q : 야단법석이라면….
A : “불교에서 행하는 ‘야외 설법의 자리’ 야단법석(野壇法席)이 아니라 부산스럽게 여기저기 다닌다는 말이지요.”
“유라시아 가상세계 구축 작업도 진행”
그러더니, 그는 털썩 캐스퍼 보닛 위에 올라 세상 편하게 웃었다. 사찰을 찾아 벚꽃 그늘에서 하늘을 찾으려던 여행객들이 뭔 일인가 싶어 쳐다봤다.
사실, 서산 부석사는 데이터상의 벚꽃 명소에 들어가지 않는다. SK텔레콤의 인공지능(AI) 서비스인 에이닷이 ‘혼잡도’로 분석한 벚꽃 명소는 석촌호수·수원화성·윤중로가 2022년과 지난해 1~3위를 지켰다. 경복궁과 일산호수공원·양재천 등에도 사람이 몰린다. 부석사 벚꽃은 번잡에서 저만치 벗어난 고요로 안내한다. 명소의 벚꽃은 끝물이지만, 부석사 벚꽃은 산 중턱이라 늦게 피어 지금이 절정이다. 게다가 곧 겹벚꽃도 핀다. 벚꽃 시즌1과 시즌2가 중간 광고시간 없이 연속 방영하는 것. “겹벚꽃 피는 다음 주에 또 여행 오셔야겠네.” 부석사 다원보살 노미숙(60)씨의 말에 김현국 탐험가는 “겹경사가 따로 없겠군요”라는 말로 답했다.
Q : 탐험가입니까, 여행가입니까.
A : “전 탐험가입니다. 탐험의 바탕에는 여행이 깔려야 하겠지요. 하지만 탐험가는 목적이 분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Q : 실패 경험도 있지요. 2001년 횡단 이후 13년간의 공백이 있었던 거로 봐서 말이죠.
A : “1996년 1차 횡단 뒤 모스크바에 수년간 살았습니다. 미국 쌀을 들여와 러시아의 신흥부유층이 좋아하던 스시집에 팔았습니다. 당시 모스크바 스시집이 400여 곳에서 2000여 곳으로 급격히 늘 정도로 인기였습니다. 당연히 돈벌이도 꽤 됐습니다. 그때 ‘길은 모스크바로 통한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이어지는 실크로드를 알게 됐고, 환경·빈곤·질병을 테마로 300명과 함께 대장정을 기획했죠. 그런데 미국 9·11 사태로 물거품이 됐고 저 혼자 떠났습니다.”
Q : 7차 유라시아 횡단 목표도 있습니까.
A : “네. 내년으로 구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여러 사람과 유라시아 횡단 이후 배편으로 대서양을 건너고, 미국을 횡단한 뒤 태평양을 건너 돌아오려고 합니다. 아마 벚꽃 필 때 갔다가 이듬해 다시 벚꽃 필 때 올 것 같습니다(웃음).”
Q : 탐험이 떠오르면 흥분되나요.
A : “처음에는 설렘으로 가득합니다. 가슴이 뛰죠, 탐험 중에는 단순해져요. 순수해집니다. 약동하는 봄에 피는 이 벚꽃처럼 순결해지는 느낌이죠.”
김씨는 ‘오늘’ 꽃길을 걷고 있지만, 그는 ‘내일’ 다시 동토 시베리아의 길을 달릴 것이다. 오늘은 일주문 앞 왕벚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지만, 내일은 일주문 뒤 겹벚꽃이 터질 것이다.
사물(四物·범종과 법고·운판·목어)이 있는 부석사 금종각(金鐘閣) 뒤편에도 벚꽃 흐드러졌다. 사찰을 벗어나고서야 품고 있던 속된 생각을, 박제영 시인의 말글을 빌려 뱉어냈다. 환장할! 봄은 얼마나 야한가.
김현국 탐험가의 작은 캐스퍼가 야하면서도 순결한 벚꽃 속으로 사라졌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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