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사색]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2024. 4. 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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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이영재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유리컵은 유리로 이루어져 있어 깨진다는 현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유리컵이 놓인 이곳은 이곳이다 침묵에서 구태여 의미를 발견하지 말자 저곳은 저곳이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유리컵에는 투명이 채워지고 비워지고 채워진다 채워진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에, 비워진다 채워진 반복을 왜곡하고 왜곡을 번복하며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조용한 대화들이 투명을 통과했다가, 유리컵은 투명을 내포하고 있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외면하되 믿는 것이 좋다 현상을 가능케 하는 건 유리컵이 유리컵을 견뎌왔다는 반증이 아니라고 할 어떠한 당위도 없어서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예측될 날카로움과 두려움에 관하여, 파편화될 감정에 관하여 의미를 피하지 않는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확신이거나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확신이다 싸우지 않고도 질 수 있다는 생각은 자만이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엔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이 내포돼 있다 반복, 반복, 번복, 반복, 번복, 번복, 번복, 번복, 반복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슬픔이 아니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가해진 의미를 투명하게 받아내며 겹쳐진 투명이 볕을 가만으로 담아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유리컵을 보며 침묵하다보면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견디지 않는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슬픔이 아니다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 유리컵에 담겼던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투명했다 투명은 쉽게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 편견처럼 위태가 흔들리고 흔들림에 흔들리는 마음,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으로서 비로소 ……깨지지 않는다 깨지지 않는 유리컵엔 하늘이 담겨 있고 확신과 폭력이 담겨 있다 유리컵은 비밀이 없다 솔직이 없다 깨지지 않는 유리컵은 투명해 보이는 자유로움으로 이루어진 피동의 결속이어서
유리컵은 깨지기 직전이다『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 (창비 2020)

어떤 영화는 암시와 복선으로 가득합니다. 곧 커다란 사건이 생길 것이라 넌지시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야기를 예측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유리컵이 깨진다거나 검은 새가 운다거나 꽃이 송이째 툭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불길함을 느끼는 것. 관객들은 이런 예감을 가지고 영화를 봅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대부분 일의 인과관계는 그리 멀리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유리컵이 깨진 이유는 내 손이 미끌미끌했던 탓입니다. 검은 새든 흰 새든 새는 늘 웁니다. 새의 울음을 노래라 여기는 경우도 많지요. 아울러 한 번 핀 꽃은 반드시 한 번은 집니다. 사월, 이런 일들로는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박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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