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무효표에 담긴 ‘양심’
1954년 자유당은 4년 중임 제한을 이승만 대통령에 한해 없애는 개헌을 추진했다. 재적 203석의 3분의 2인 136표 이상이 필요했다. 자유당은 야당과 무소속 의원을 회유해 137표를 확보했다. 결과는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 무효 1표였다. 자유당은 “사사오입 원칙에 따라 개헌 정족수는 135표”란 논리로 부결을 가결로 뒤집었다. 만약 무효 1표가 찬성이나 반대로 갔다면 사사오입 논란은 없었을 것이다.
▶국회 표결 때 의사국장은 ‘가·부·可·否’ 4개 이외의 문자나 기호를 표기하면 무효 처리된다고 거듭 안내한다. 기표소 벽에도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붙는다. 그래도 무효표가 나온다. 의원들이 표기법을 모를 리 없다. 무효표는 고민의 산물로 기권보다 더 적극적인 의사 표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표결에서 자주 나온다.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표결에선 무효표가 7장 나왔다. 작년 9월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 동의안 표결에선 4명이 무효표를 던졌다. 찬성표를 던지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 민주당 의원들이었을 것이다.
▶일반 유권자들도 무효표로 의사 표시를 한다. 2014년 일본 오사카 시장 선거에서 무효표는 역대 최대인 13.5%였다. “장난치지 마세요” “세금 낭비하지 마세요”라고 적거나 백지를 냈다. 위안부 망언을 일삼던 하시모토 시장의 불통 행정에 대한 경고다. 지난달 러시아 대선에서 푸틴 대통령은 87.3%를 득표했다. 재외국민 투표에선 72.3%로 차이가 났다. 무효표가 7% 가까이 쏟아진 영향이었다. 대선 직전 의문사한 푸틴의 정적 나발리의 이름을 투표용지에 적는 등 저항 움직임이 일었다.
▶이번 총선 세종갑에선 무효표가 6700장 나왔다. 전체의 5.5%였다. 세종을(1.2%)의 4배가 넘었다. 선거 직전 민주당 후보가 부동산 갭 투기 의혹으로 공천 취소된 곳이다. 덕분에 민주당을 탈당한 새로운미래 김종민 후보가 당선됐다. 무효표 대부분은 국민의힘 후보를 찍기는 싫고 그렇다고 김 후보에게도 표를 주기 싫은 민주당 지지층에서 나왔을 것이다.
▶경기 수원정에서 ‘이대생 미군 성상납’ ‘퇴계는 성관계 지존’ 같은 말로 큰 논란을 일으킨 민주당 김준혁 후보가 2377표 차로 신승했다. 그런데 그 두 배인 4696표의 무효표가 나왔다. 나머지 수원 지역구 4곳은 1400~1900표 수준이었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도 ‘차마 이런 사람은 못 찍겠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일까. 그렇다면 그나마 ‘최소한의 양심’이 담긴 무효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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