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여행자의 ‘여행’ 고민 [파일럿 Johan의 아라비안나이트]
[파일럿 Johan의 아라비안나이트-19]
“여행 많이 하시겠어요!”
가끔 내 자신을 파일럿이라고 소개하면 자주 듣는 말이다. 항공업계에서 여행은 어떻게 보면 부속물과 같다. 특히 목적지가 먼 장거리 비행의 경우 보통 항공 승무원들은 그 나라에서 하루나 이틀정도 머물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레이오버(layover)’를 한다.
레이오버는 보통 5시간 이상 비행의 경우 법적으로 현지에서 일정 시간 무조건 쉬게끔 되어 있는 제도다. 현지에서 바로 돌아오는 건 ‘턴 어라운드(turn around)’라고 부른다. 호텔 등 당연히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체류비용은 회사에서 지원한다. 항공사마다 거리와 시간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현지 체류비를 직접 크루에게 주기도 한다. 일종의 외국여행 단기휴가인 셈이다.
그러기에 승무원들 가운데는 여권 페이지가 금방 출입국 도장으로 꽉 찬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이런 이유로 종종 “많은 나라들 여행을 다니니 견문이 넓어지겠어요”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스스로는 참 민망한 일이다. 일을 하면서 지금껏 견문이 과연 넓어졌나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좋은 여행이란게 무엇일까. 한국인으로서 거의 모든 나라에서 비자가 필요없고, 비행기표만 싸게 구입하면 누구나 주말에 초밥먹으러 일본 다녀오고 우육면 먹으러 대만도 다녀올 수 있는 이 시대에, ‘여행’이란 단어는 매우 쉽게 소비되는 행위 아닌가.
일단 내가 생각하는 여행이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해외여행은 더 그렇다. 단순히 놀고 먹고 오는걸 넘어서 나를 성장시키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행이 되려면 그 곳의 문화를 체험하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넓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이자 유명 작가였던 고(故) 다치바나 다카시(1940~2021)는 여행의 정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상성에 지배되는 패턴화된 행동(routine)의 반복에서는 새로운 것이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지성도 감성도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고, 의욕적인 행동도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知·情·意 모든 면에서, 일상화된 것은 의식 위로 올리지 않고 처리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처리된 것은 기억도 되지 않게끔 되어 있다. 의식 위로 올라가 기억에 남는 것은 ‘색다름(novelty)’의 요소가 있는 것뿐이다.
여행은 일상성의 탈피 그 자체이므로 그 과정에서 얻은 모든 자극이 ‘색다름’의 요소를 가지며, 따라서 기억이 되는 동시에 그 사람의 개성과 지·정·의 시스템에 독창적인 각인을 새겨 나간다. 그러므로 여행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들이 그 사람을 바꾸어 나간다. 그 사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어 나간다. 여행 전과 여행 후의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 없다
-다치바나 다카시 <사색기행> 중
그런데 오히려 글로벌화된 세계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카시 옹이 말했던 일상성의 탈피와 자극을 통해 사람이 고쳐지는 과정의 여행을 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것만 같다는게 요즘 생각이다.
파일럿이 많은 나라를 간다고는 하지만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거나 교류할 기회는 좀처럼 없다. 보통 목적지에 착륙을 하고 비행이 끝나면 공항을 나서자마자 곧바로 전용 리무진 버스를 타고 바로 승무원들이 묵는 호텔로 다같이 이동한다.
호텔에 도착하면 체력 좋은 승무원들은 곧바로 밖에 나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피곤함을 호소하면서 호텔에서 푹 쉰다. 그렇게 자고 밖에 나가면 주어진 자유시간은 반나절 남짓이다. 여유있게 무엇을 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얼마 뒤 시간이 되면 다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공항에 내려 돌아오는 비행을 소화한다.
여기에 전 지구적으로 글로벌화가 이뤄지면서 이제는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 하더라도 그 나라의 웬만한 4성급 이상 호텔들은 서비스와 시설이 부자나라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글로벌 스탠다드가 확립된 탓이다. 좋게 말하면 서비스의 상향평준화고 나쁘게 말하면 서비스의 획일화다.
어디를 가든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지금은 어느나라에 가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을 끊임없이 즐길 수 있다. 언어도 아랍어를 쓰든 중국어를 쓰든 독일어를 쓰든 상관없다. 현지어를 몰라도 영어만 할 수 있으면 웬만큼 다 통한다.
언젠가 에그타르트가 처음 만들어졌다는 포르투갈의 맛집에 간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한국 것이 더 맛있었다. 음식이나 특산물도 예전에는 어느 특정한 지역에 가야만 즐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기나 여기나 별 차이가 없고 새로운 것이 없다.
이렇게 되다 보니 나라와 나라를 자유롭게 국제적으로 이동하면서 여행한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활동하는 ‘일상’이라는 캡슐이 있고 그 캡슐만 여기저기 이동하는 느낌이랄까. 진득하게 사색에 잠기고 찬찬히 둘러보며 견문을 넓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항상 든다.
언젠가는 세계 최빈국중 하나에서 레이오버를 한 적이 있었다. 이 곳에도 이미 글로벌 호텔 브랜드가 자리잡아서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고급 호텔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외양을 자랑하고 있었다. 슬럼가 속 우뚝 솟은 고급 호텔은 ‘나는 너희들과 달라’라고 말하는 듯 했다.
“물도 잘 나오고 호텔도 굉장히 깨끗해요.”
”밥도 맛있어요. 프론트도 친절해요.”
쾌적하고 편안한 호텔 덕에 모두들 기분이 좋았지만 이것이 그 나라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반면 서구식으로 근대화된 공항과 호텔을 리무진 버스로 왕복하는 동안 호텔 밖 세계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상하수도가 정비되지 않아 냄새가 진동했고 아이들은 구걸을 했다. 도로는 움푹 파였고 길거리에는 쇠똥이 가득했다. 이런곳에서 내가 묵는 호텔처럼 칫솔과 샴푸를 한번 쓰고 버리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러시아 출신의 나이 지긋한 기장이 어느날 비행하면서 나에게 한 말이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호텔들, 특히 중국이나 동유럽처럼 공산주의를 따랐던 국가들의 호텔들이 이렇게 좋지는 않았다고 한다.
“물 나오는거 녹물이 그냥 나오네.”
”이거 봐. 미니바 안의 음료수 유통기한이 지났어.”
그때만 해도 외국인 전용 최고급 호텔로 선정된 곳마저 이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고생을 해야지만 나를 찾는 진정한 여행이란 의미는 아니지만, 외국에 가서 럭셔리 호텔 안에서만 머물다 돌아온다면 그걸 진정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출장이나 레이오버를 할 때 “좋은 호텔에서 잘래 아니면 현지 경험을 해볼래?”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를 고를테니, 파일럿 일을 하는 동안 여행이 아닌 ‘단순 이동’은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원요환 UAE항공사 파일럿 (前매일경제 기자)]
john.won3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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