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24. 수색하고 토벌하라. 울릉도에 수토군(搜討軍)을 보내다
■주민 쇄환 전후 안무사·경차관 등 파견
-무릉·우산, 삼봉도 등 탐색
조선 태종 때 섬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쇄환(刷還)정책’으로 울릉도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켰다고 해서 조선이 동해상의 도서(島嶼)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다.
역사를 살펴보면 울릉도와 독도 등 동해의 섬에 조선 관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공도(空島)정책’으로 섬을 포기했다는 식의 주장이 조선의 도서 관리 정책에 대한 곡해와 왜곡의 소치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반증 자료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 기사 전편에서 우리는 조선 태종과 세종 때 섬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돼 울릉도에 들어갔던 삼척 사람 김인우(金麟雨)의 행적을 살펴본 바 있는데, 실록에는 김인우 일행의 항해와 관련된 후속 조치가 전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세종7년(1425년) 기록에는 ‘예조와 호조에 명을 내려 무릉도에 들어갈 때 배가 깨어져 사망한 강원도 선군(船軍·수군)의 초혼제를 지내게 했다. 김인우가 일본으로 표류했다고 말했으나, 임금께서는 배가 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있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강원도 선군’이라고 명시된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왜구 등의 침탈로부터 울릉도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육지로 쇄환하는 작업에 삼척 사람 김인우를 필두로 강원도 수군들이 동원됐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성종(1472년) 때에는 박종원이 삼봉도경차관(三峯島敬差官)으로 임명된다. 당시 임금은 박종원을 시켜 부역과 조세를 피하고자 도피한 백성이 있는지 삼봉도를 탐색·순찰할 것을 명하면서 ‘삼봉도는 우리 봉역(封域) 내에 있으니 명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군법으로 다스리라’는 전교를 내리기도 한다. 여기서 ‘삼봉도’라는 이름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릉도·우산도 등은 많이 들어봤지만, 삼봉도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이때 삼봉도 경차관으로 임명됐던 박종원은 태풍을 만나 병력을 잃고 표류하던 중 무릉도를 발견했으나 상륙하지는 못하고 육지로 돌아온다. 여기서 박종원이 표류 중에 닻을 내리려 했던 무릉도는 울릉도, 탐색 조사를 하려했던 삼봉도는 독도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될 수 있다.
■수색하고 토벌하라-수토관(搜討官)의 등장
울릉도·독도 등 섬 관리는 조선 중·후기에 들어 ‘수토 정책’으로 강화된다. 수토(搜討)는 ‘수색하고 토벌한다’는 뜻을 지녔다. 즉, 토산물이나 해산물을 몰래 채취하거나 왜인(倭人) 등 불순한 의도의 침입자들이 있는지 살펴 토벌하라는 뜻이다. 삼척영장 등의 울릉도 수토 사실은 조선 정부가 펴낸 관찬(官撰) 사서 외에도 민간의 문중 등이 보관하고 있는 기록문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있기에 관찬 기록보다 훨씬 많은 수토가 이뤄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병휴 경북대 교수는 ‘울진지역과 울릉도·독도와 역사적 연관성’이라는 제하의 논문(영남대 민족문화연구총서 26권 수록)에서 영남일보의 2000년 3월9일자 27면 보도 내용을 들어 의성김씨 송호공파(松湖公派) 종친회가 보관하고 있는 ‘송호실적(松湖實蹟)’에 강원도 삼척영장 김연성(金鍊成)이 광해군 5년(1613년) 3월에 군사와 포수 등 260명을 거느리고 울릉도 등지를 수토한 사실이 나와 있다고 소개했는데, 이는 본격적인 수토가 이뤄진 숙종 이전의 수토 기록이기에 주시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영남일보는 보도에서 ‘삼척영장 김연성이 울릉도에 들어간 이유에 대해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한 무리가 해도에 잠입해 약탈을 일삼았다. 조선에서 죄를 짓고 달아난 유민들도 그들과 함께 어울려 울릉도를 소굴로 삼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김연성과 군사 260명을 울릉도에 보내 정세를 살피도록 명했다’고 전하면서 ‘왜노(倭奴)들이 이 사실을 알고, 모두 달아나 버려 뱃길을 돌려 돌아오는 도중 거친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면서 대부분 익사하고, 한 척만 평해(울진 지역)에 도착하니 생존자는 몇 사람 뿐 이었다’고 기록했다.
■안용복 ‘거사’ 후 정기적 수토로 강화
이런 와중에 숙종 19년(1693년), 저 유명한 ‘안용복 사건’이 발생한다. 현재 우리 국민들에 의해 ‘장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안용복은 1693년 봄 울릉도에 갔다가 그곳에서 일본 어부들이 불법으로 침입해 고기잡이하는 것을 보고 분개해 “왜 조선 땅에 일본인들이 함부로 침입했냐”며 꾸짖고 다투다가 일본 어부들에 의해 오키도(隱岐島)로 납치되는 등의 고초를 겪은 인물이다. 그는 당시 오키도주에게 울릉도가 조선 영토 임을 주장하고, 이어 1696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막부의 관백에게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독도를 불법 침범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거사’를 실행에 옮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외교문서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 임을 재확인하게 되는데, 1696년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호키슈(佰耆州·현재의 돗토리현) 태수를 통해 써준 서계에는 ‘두 섬, 즉 울릉도와 독도가 이미 당신네 나라(조선)에 속해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공적에도 불구하고, 안용복은 고위 관리인 정3품 당상관을 자처하면서 허락 없이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 등으로 인해 사형을 언도받은 뒤 후일 형량을 줄여 멀리 귀양을 떠나는(減死遠配) 유배형의 처벌을 받게 된다. 비록 귀양을 가는 처벌을 받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정조 때 편찬된 ‘증보문헌비고’는 ‘왜국이 울릉도의 섬들을 자기들 땅이라고 두 번 다시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로지 안용복의 공’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현재 울릉도 도동 약수공원에 있는 충혼비에는 ‘슬프다, 역사를 상고해보면 매양 숨겨진 속에 큰 인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니, 저 동래 사람 안용복 님이 바로 그 한 분이시다’라고 추앙하고 있으니, 민초들의 가슴에 흐르는 역사는 숨겨진 인물들의 공이라고 해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안용복 사건이 발생하면서 조선의 울릉도·독도 정책은 적극적인 관리와 정기적 수토로 전환된다. 안용복이 1차 도일(渡日)한 1693년 겨울 대마도주가 조선 어민들의 울릉도 출어를 금지토록 해 달라는 서한을 조정에 보내온 것도 조선이 적극적으로 섬을 관리하는 수토제 촉발의 요인이 됐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로 시작되는 시조로 유명한 숙종 때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은 안용복 구명에 앞장선 사람이기도 한데, 현재의 동해시 망상동 약천마을에서 유배 생활을 하기도 한 남구만은 임금에게 울릉도 등의 섬을 적극적으로 지킬 것을 건의한다. 즉, 삼척첨사를 파견해 섬의 형세를 조사하고, 백성들을 모집해서 이주시키는 한편 수군의 진(鎭)을 설치해 지킨다면 왜인들이 곁에서 노리는 걱정거리를 방비할 수 있다는 남구만의 건의 내용이 숙종실록에 나와 있다.
■2∼3년에 한번씩 수토군 파견
-삼척영장과 월성만호가 교대로 수행
-한번에 80∼150명 규모 수토군 편성
이에 따라 숙종 때부터는 2∼3년에 한 번씩 수토관들을 파견해 섬을 관리하고 살피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숙종 20년(1694년) 삼척영장 장한상(張漢相)이 배 6척에 군사 등 150명을 거느리고 삼척에서 출발해 울릉도 일원을 수토했다. 후일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면서 무장으로서 탁월한 행적을 보인 장한상은 안용복 사건이 발생하는 와중에 조정에서 울릉도·독도 수토제를 본격 시행하면서 파견한 첫 수토관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와 행적이 더욱 각별하다.
강역을 침범한 무리를 토벌하라며 정기적으로 수토관과 군사들을 파견한 것은 조선 조정이 동해와 섬에 대해 공세적 주권 행사를 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수토를 게을리 한 죄를 물어 관리를 파면한 기록도 있으니 조선 조정이 당시 울릉도, 독도 수토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실감할 수 있다.
장한상 이후 수토관들의 울릉도 순찰 기록은 강원도와 삼척, 울진 등지의 향토 사료에도 적잖이 발견할 수 있다. 숙종 28년에는 이준명(李俊明)이, 영조 11년(1735년)에는 김선의(金善義)가 울릉도 등지를 순찰하고 지형도와 토산품을 조정에 헌납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울릉군지는 이와 관련, 숙종 이후 울릉도 순찰 조사는 삼척영장(수군첨절제사)과 울진의 월송만호가 한 번에 80∼150명 규모로 수토군을 편성해 교대로 수행하게 되는데, 이는 울릉도 수토가 뱃길로 이동하는 특성상 (강원도) 수군의 동원과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금 삼척항을 굽어보는 육향산 아래에 가면 산으로 오르는 계단 길옆에 오래된 비석들이 줄지어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울릉도·독도를 순찰했던 삼척영장 등 수토관들의 공적을 기린 것이다.
또 동해안에서 배를 타고 가면 가장 먼저 닿게 되는 울릉군 서면 태하리 일원에는 조선시대 수토관들이 남긴 석각(石刻)들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석각을 통해서도 당시 수토관들의 행적과 규모 등을 알 수 있다.
■삼척영장 박석창 등의 수토 각석문 눈길
영조 11년(1735년) 울릉도를 수토한 삼척첨사 구억(具億)은 군관 최린(崔燐) 등과 함께 태하동에 석각을 남겼고, 숙종 37년(1711년)에 울릉도를 수토한 박석창도 ‘울릉도도형(圖形)’과 함께 보고서를 조정에 올리면서 울릉도 현지에는 자신과 수행한 사람들의 신분과 이름을 돌에 새겨 남겼다. 지난 1936년 도동항 수축공사지에서 발견된 박석창의 각석문은 울릉도에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각석문으로, 현재 문화재자료(413로)로 지정돼 있다.
박석창은 1711∼1712년에 절충장군 삼척영장 겸 수군첨절세사를 지낸 인물이다. 박석창의 각석문에는 수토 행적, 당시 함께 울릉도 수토에 나선 일행의 명단 등과 함께 험난한 뱃길을 헤친 장군의 기개가 넘치는 문장이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만 리 푸른 바다에, 장군이 되어 멋들어진 배를 타고 나섰다. 대장부로서 평생 충성과 신의를 지켜 험난한 일을 처리했으니, 이후로는 걱정거리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조선시대 수토관들이 어떤 심정으로 울릉도 항해에 나섰는지 잘 보여주는 시이기에 영토 수호사에서 더욱 그 의미가 소중하다고 하겠다.
박석창은 삼척영장 재직 첫해 5월에 울릉도 수토에 나섰으니까 아마도 항해에 적당한 시기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울릉도 항해부터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울릉도 수토관으로서의 임무는 당시 삼척영장이나 월송만호에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들 수토관들은 울릉도에 다녀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태하리의 명소인 황토구미에 들러 이곳에서만 나는 붉은 황토 흙을 떠 가기도 했다.
물론 그들 수토관의 울릉도 항해는 앞에서도 살펴본 것처럼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의 여정이었고, 희생도 많았다. 그들 수토군(搜討軍)의 목숨을 건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울릉도·독도가 온전히 한민족의 영토가 된 것이라는 것을 오늘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참고= 기사에 인용(참고)된 논문과 책, 인터뷰 직함은 논문 발표와 책 발간, 인터뷰 당시의 근무처와 직책을 준용했음을 밝힙니다. 조선시대 삼척영장 겸 수군첨절제사 박석창이 신묘년 5월에 울릉도를 수토했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각석문이다.(독도박물관 향토사료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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