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우위’ 구도 깨지자 경쟁이 거칠어졌다
흔히 시장에서의 경쟁이 혁신을 낳는다고 한다. 이에 정치를 빗대면 이렇게 된다. 선거라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정당이나 후보들이 혁신을 통해 더 나은 대안을 제공한다. 하나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나를 높이는 상품시장의 혁신과 달리 정치시장에선 상대를 낮추는, 즉 경쟁자에 대한 비판이나 흠잡기로 점유율을 높일 수도 있다. ‘우리’에 대한 긍정적 호감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부정적 반감을 늘리는 전략이다. 지금의 미국이 딱 그렇다. 미국의 정당·후보자들은 “지지자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후보의 지지자들이 투표하지 않도록 공격하는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크렌스·긴스버그,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두 가지가 포인트다. 하나는 경쟁의 정도가 치열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이나 후보의 전략적 선택이다. 우선 선거의 경합도 상승이다. 1932년 루스벨트의 이후 미국 민주당은 전쟁영웅 아이젠하워의 높은 인기 때문에 1952년과 1956년 대선에서 졌을 뿐 1968년까지 늘 승리했다. 그러나 그 이후 2020년까지 치러진 14번의 대선에서 두 당은 팽팽하게 맞섰다. 공화당이 8번, 민주당이 6번 이겼다. 민주당이 늘 압도하던 의회선거에서도 1994년을 기점으로 각축하는 구도로 바뀌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민주-공화 양당의 유권자 지지 규모가 대등한 균형의 정당정치로 바뀌면서 양당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오바마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 시대를 지나면서 분열과 대립이 더욱 고조되는 정치적 양극화가 더 심화되고 있는 현상이 미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뚜렷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는 점이다.” 정진민 교수의 지적이다.
우리는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민주화 이후 보수의 우위가 약화되는 추세가 점차 분명해졌다. 14대 대선(1992년)에서 보수후보 김영삼은 보수표의 분산을 야기한 정주영(16.3%)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42.0%를 얻어 33.8%를 얻은 진보후보 김대중에게 승리했다. 그만큼 3당 합당으로 구축한 보수의 우위는 강고했다. 뒤이은 15대 대선(1997년)에서 1.53%포인트 차로 패했으나 보수로선 자신의 분열(김종필의 김대중 지지, 이인제의 독자 출마)에 외환 위기라는 국난의 책임까지 더해진 데 따른 결과라는 점에서 위안으로 삼을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1:1로 맞붙은 16대 대선(2002년)의 패배는 충격이었다. 2.33%포인트 차였는데, 또 다른 진보후보 권영길의 득표율 3.9%까지 감안하면 보수 우위 구도의 붕괴는 놀라웠다. 이제 선거가 누구의 우위를 말하기 어려운 경합구도로 바뀐 것이다. 보수가 비록 17대 대선(2007년)에서 대승했으나 이른바 ‘반노 정서’라는 거대한 시류에 따른 일회적 반등일 뿐 호각지세가 내용적으로 흐트러진 건 아니었다. 그 다음 18대 대선(2012년)에서 맞대결한 박근혜와 문재인은 각각 51.55%와 48.02%를 얻을 만큼 예측불허의 경합 선거를 펼쳤다. 현직 대통령 탄핵 뒤의 19대 대선(2017년)은 통상적 흐름에서 일탈한 것인 바 예외로 친다면, 20대 대선(2022년)에서도 살얼음판의 박빙 선거가 재연됐다. 윤석열과 이재명 간의 격차는 0.73%포인트에 불과했다. 2002·2012·2022년 대선에서 양당 후보가 얻은 평균 득표율은 48.9% 대 48.2%였다. 초박빙의 경합구도가 굳건히 자리 잡은 것이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지역구 기준으로 34.5%를 얻어 25.3%의 새정치국민회의(현 더불어민주당)를 압도했다. 통합민주당 11.2%, 자유민주연합 16.2%까지 포함해 보수와 진보로 대별해 보면 50.7% 대 36.5%로 보수가 압도했다. 확고한 보수 우위 구도였다. 역사상 첫 정권교체 후에 치러진 2000년의 16대 총선에서도 이 격차는 유지됐다. 한나라당이 39.0%, 새천년민주당이 35.9%, 자민련 9.8%, 민주국민당 3.7%를 얻었다. 역시 보수 대 진보로 나눠 보면 49.4% 대 35.9%로 이전 총선에 비해 큰 차이가 없었다.
이런 흐름은 17대 총선(2004년)에서 결정적으로 반전하게 된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이 의결된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은 37.9%를, 열린우리당(현 더불어민주당)은 42.0%를 얻었다. 사상 최초의 의회권력 교체였다. 자민련의 2.7%, 새천년민주당의 8.0%를 더해 보수 대 진보로 분류해 보면, 40.6% 대 50%로 격차는 더 벌어진다. 보수정당이 다시 정권을 획득한 후 치러진 18대 총선(2008년)에서 양자 간에 재역전이 이뤄졌으나 그때 뿐이었다. 18대 총선의 투표율은 46.1%로 이전 17대의 60.6%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따라서 보수의 압승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결과로 보인다. 19대 총선(2012년)도 정당 득표율을 보수와 진보로 대별했을 때 45.5% 대 43.9%로 박빙의 구도였다. 이런 경합의 구도는 20대 총선(2016년)에서도 이어졌다. 특정 성향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국민의당 득표를 제외하면, 38.3% 대 38.6%로 보수와 진보의 지지율은 초박빙이었다. 2000년 후 6번의 총선에서 국민의힘 계열과 민주당 계열 정당의 평균 의석비율은 44.3%(131석) 대 43.9%(130석)로 나타났다. 민주당이 전례 없이 대승한 2020년의 코로나 총선을 빼면, 46.3%(139석) 대 40.7%(122석)이다.(최병천, ‘이기는 정치학’)
다음으로, 정당과 후보의 선택이다. 지지 기반의 규모가 엇비슷하고, 지지율도 오차범위 안에 있으면 경쟁이 거칠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승자 독식이니 이런 상황에선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평소 투표할 동기를 찾지 못하던 이들을 새롭게 투표장에 끌어내는 방법과 지지표는 최대한 동원하고 상대표는 기권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전자, 즉 동원전략은 차별화된 대안 제시와 투표율 상승으로 나타나고 후자의 결집전략은 막말과 감성 호소로 나타난다. 우리 정당들도 미국처럼 동원이 아니라 결집을 선택했다. 1997년 대선 투표율이 80.7%인데, 그 5년 뒤의 대선에서는 70.8%로 떨어졌다. 총선의 경우, 1985년 총선에서 84%를 기록한 후 계속 떨어져 2000년 57.2%로까지 내려갔다가 그 다음 총선에서 60.6%로 약간 반등했다. 그러다가 다시 하락해 2008년에는 46.1%, 2012년 54.2%를 기록했다. 투표율의 하락은 정당·후보자들이 ‘경쟁후보의 지지자들이 투표하지 않도록 공격하는 선거운동’에 주력했다는 뜻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었던 건 아니다. 분단체제가 강제하는 협소한 이념 공간, 지역주의에 따른 유권자 분할, 선거운동의 방식과 기간 제한, 인물과 연고에 기반을 둔 정당 체제 등으로 인해 이념의 확장과 정책의 차이를 통해 유권자들을 동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냉전의 종식 이후에도 정당들은 정치 효능감을 높여 동원을 끌어내는 노력을 외면했다.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투표율이 낮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보정당의 책임이 더 크다. 정치를 통해 힘들고 어려운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개선하려는 세력, 즉 진보라면 이들 사회경제적 약자들이 투표장으로 나오도록 하는 정책적 유인을 제공하는 역할은 진보정당의 태생적 책무이기 때문이다. 진보는 무능했거나 게을렀다.
전쟁처럼 치러진 22대 총선, 진보진영이 21대에 이어 다시 압승했다. 이제 민주당이 주도 정당(leading party)이 되고, 보수와 진보 간의 오랜 박빙 구도 역시 해소된 것일까?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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