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커피하우스] 22대 총선에서 정책 선거가 실종된 이유
혐오·부도덕·적반하장이 지지받는 사회
우리가 아는 상식·인성·염치는 어디 있나
사회를 떠받드는 공통의 가치에 동의해야
정책 논쟁 가능하고 미래 비전 놓고 경쟁
불행히도 우리는 그런 준비 안돼 있는 듯
상대방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가 알아보는 테스트로 ‘그래서 뭐?(So what?) 테스트’라는 게 있다. 가령 동생을 때린 아이에게 엄마가 “왜 때렸어?” 하고 꾸중했다 가정해 보자. 이때 “그게 뭐 어때서?”라고 답한다면, 그 아이는 엄마와 폭력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때린 건 잘못이지만 맞을만한 짓을 했어”라고 답한다면, 그 아이는 적어도 폭력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다.
이 테스트를 해야 하는 것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과는 상호 설득은커녕 소통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사회를 떠받드는 공통 가치 위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사실을 규명하고 정책을 논의할 수 있다. 서로 지향하는 가치가 다른 사람과는 상대방에게 완전히 맞추거나 아니면 포기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평화롭게 공존하기 어렵다.
특히 사회를 향한 설득 메시지를 구성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와 신념 체계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진실보다 진실 같은 거짓이라도 대중이 믿는다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했고, 18세기 영국의 작가 토머스 페인도 상식의 힘을 역설한 바 있다. 그가 말한 상식은 거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각자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의 산물이다.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는 사회에서 코페르니쿠스는 역적이다. 사회의 상식이란 그렇게 무섭다.
희대의 여대생 성상납 망언과 전방위 역사 왜곡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더불어민주당 김준혁(경기 수원정) 후보가 논란의 중심에 섰을 때 나는 그가 조만간 하차할 줄 알았다. 그 정도 무지와 무신경, 혐오주의가 드러난 사람이라면 낯이 뜨거워서라도 표를 달라고 하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틀렸다. 그는 꿋꿋하게 완주했고, 유권자의 선택을 받아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거기에는 이재명 당대표의 도덕적 지지와 일부 극렬 운동가의 퍼포먼스가 뒷심으로 작용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당의 상식에 비추어 김 후보는 크게 문제가 없는 후보였던 것 같고,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그 지역 유권자들의 상식이었을 것이다.
민주당 양문석(경기 안산갑) 후보는 좀 더 심각하다. 딸의 사업 자금이라고 속여 받은 대출금으로 서울 잠원동 아파트를 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게 편법이 아니라 명백히 불법이라는 사실을 금융감독원이 공식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다. 도덕이나 품위 문제도 아니고 법을 어긴 후보라면 적어도 내 상식으로 입법부에 들어가기에 부적격이다. 해서 그도 하차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가 틀렸다. 그는 오히려 “피해자가 있느냐?”며 언성을 높였고, “내 허물을 덮어달라”고 읍소했다가 “한동훈 너부터 깨끗하게 살라”며 외려 공격 모드로 돌았다. 부끄러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역시 완주했고, 그와 상식을 공유하는 지역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아 여유 있게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당에서 후보들의 검증이 소홀할 수도 있고, 과거 허물이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 “그게 뭐가 문제인데?”라고 되묻고 버티는 건 다른 문제다. 아마도 최악의 도덕성 선거로 기록될 이번 선거에서 마주친 불편한 진실은 그런 불법과 부도덕과 혐오와 적반하장이 걸러지거나 비난받기는커녕 오히려 국민의 지지를 얻어 완주하고 승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이건 정파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가치, 인성과 염치 문제다.
이름도 나르시시스트적인 ‘조국혁신당’이 의석을 휩쓴 건 연구 대상이다. 사정이야 여하간 그는 특수한 위치에서 보통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방식으로 자녀의 입시 비리를 저질렀고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가 명예를 회복하고자 급조한 당에 지지자가 몰리고 실제 다수 표로 이어지는 현상은 그를 범죄자로 보기보다 검찰의 희생양으로 보는 사람이 상당수라는 증거다. 조국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상식 체계는 무엇이며, 그들에게 법과 정의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각종 ‘사법 리스크’로 조사와 재판을 받는 당대표가 이끄는 당이 가볍게 의회 과반을 휩쓴 이번 총선을 목도하며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는 온전한지, 그리고 상식은 건강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날조된 사실에도 “그게 뭐 어때서?”라고 치부하고, 혐오성 막말에도 “그게 어디가 어떤데?”라고 반응하며, 법을 좀 어겨도 “그게 뭐 대수야?”라고 하는 사회는 아닌지 말이다.
적어도 드러난 여러 상황에 따르면 우리 사회는 범법자에 대해 한없이 관대한 것 같다. 그런 곳이라면 법을 쉽게 어기고, 처벌도 우습게 알 것이다. 소고기를 먹고 삽겹살을 먹었다는 정치인의 거짓말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 곳에서는 거짓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횡행할 것이다. 범죄를 저질렀어도 처벌이 과하다며 무한 온정주의를 발휘한다. 사실무근인 말을 떠드는 후보도 쉽게 용서하는 사회. 산 자건 죽은 자건 아무 말이나 붙여 망신 주는 사람에게 환호하는 사회. 정치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모교도 죽이고, 이모도 창녀로 만들고, 자기편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감싸는 사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가치 기준이 흔들리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정책 논쟁을 하려면 순서가 있다. 먼저 사실관계를 규명하고 동의한 후, 그 사실의 가치에 대해 합의하고, 그다음에 더 나은 미래를 놓고 경합하는 것이 정책 논쟁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아직 그 정도 차원의 논쟁을 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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