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영웅을 위하여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아메리칸 스나이퍼'(2015년)는 미국 네이비실의 전설적 저격수 크리스 카일의 일대기를 그렸다. 그는 이라크 전쟁에서 200명 넘는 적군을 저격해 사살했다. 스코프에 포착된 표적 중엔 자살폭탄을 매달고 뛰어드는 어린아이와 여성도 있다. 그의 총탄이 표적의 심장을 뚫는 순간 그의 내면 역시 죽음의 이미지에 저격당했을 것이다.
전역 후 카일은 총성 없는 평온한 일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다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앓는 참전병사들을 돕는 활동에 나서며 건강한 삶을 회복하는 듯했다. 하지만 2013년 자신이 돕던 PTSD 환자인 해병대 저격수 출신 에디 루스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카일의 아내는 전쟁터에서 싸운 남편이 전쟁터 밖의 현실과 더 처절히 싸웠다고 말했다.
'람보-퍼스트 블러드'(1982년)에서 베트남전 용사 존 람보는 함께 참전한 전우들이 극심한 PTSD를 앓다 자살하거나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듣는다. 전우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시골마을에서 그는 부랑자 취급을 받으며 격리된다. 경찰에 강제구금돼 폭행당하자 무기고를 탈취, 인간병기가 돼 마을 전체를 박살낸다. 그의 옛 지휘관인 트라우트먼 대령이 람보의 광기를 멈추고자 대화를 시도한다. "혼자서 전쟁을 계속 하려는 건가. 작전은 끝났어."
"끝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돌아왔을 때 모든 눈이 살인자를 보는 듯했죠. 누가 저를 보호해주죠? 모두 어디 있나요? 내 친구 램포드, 유쾌한 내 친구. 내 친구는 누구죠? 아무도 없어요. 난 친구가 필요해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
몇 해 전 생활고를 겪던 제1연평해전 용사가 편의점에서 콜라를 훔치다 붙잡혔다. 포탄의 파편을 맞아 오른손에 후유장애가 생겼다. 유공자연금을 사기로 날리고 빚을 진 채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지난해 6월에는 한국전쟁 참전용사가 배고픔을 못 견디고 마트에서 반찬을 훔친 일도 있었다. 국가보훈처의 국가보훈대상자 생활실태조사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10명 중 4명은 소득이 아예 없다.
지난해 12월 제주 서귀포시 감귤창고 화재현장에서 임성철 소방교가 순직했다. 올해 2월엔 경북 문경 냉동식품공장 화재로 김수광 소방장과 박수훈 소방교가 세상을 떠났다. 지난 한 해 동안 소방청 소속 소방관들이 사비로 지출하고 지급받지 못한 출장비만 5000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열악한 처우 가운데 장비구입과 출장 등 업무를 위해 꼭 필요한 예산지원마저 충분치 않은 탓에 소방관들은 생명과 함께 생계까지 희생한다.
참전용사와 독립유공자는 대부분 생활고와 병환에 시달린다. 참전용사증서와 무공훈장, 유공자증은 밥 한 끼와 바꿔 먹을 수도 없는 무용지물이다. 존경 없는 명예는 그들에게 멍에일 뿐이다. 명예에 합당한 존경과 진정성 있는 예우, 그리고 실질적 지원과 보상이 영웅들에게 필요하다. 군인, 소방관, 경찰 등 '제복에 대한 존경'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돼야 한다. 우리의 행복과 꿈은 영웅들의 희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마지막 장면에선 크리스 카일의 실제 장례식 영상을 보여준다.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댈러스 카우보이 스타디움에서 장례식이 진행되고 운구차가 도로로 나서자 시민 수만 명이 성조기를 흔들며 영웅을 추모했다. 자신들을 위해 삶 전체를 희생한 이에게 단 몇 분이나마 하루의 일부를 내어주며 존경과 감사를 보냈다. 얼마 전 방송인 이지혜씨가 순직 소방관을 위해 1000만원을 기부했다. 고 임성철 소방교의 동료라고 밝힌 이는 "가까운 동료가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겪어 스스로도 앞으로의 현장활동에 대해 고민이 많았는데 이런 선행으로 잡다한 고민은 사라지고 할 일을 해야겠다는 명확한 신념이 생겼다. 고맙다"고 말했다. 그 명확한 신념에 이제 우리가 보답할 차례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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