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봄·산의 봄’ 발로 누빈 강원 세세하게 서술
-춘곡(春谷) 형에게 (1927년 4월 ‘별건곤’, 2권4호)
‘춘곡형’으로 시작하는 부분
춘천 상징하는 이름이라거나
실제 인물 호칭만 부여했거나
가상-실존 인물 의견 분분
춘천 소양호·조양루 등 언급
지금 없는 충적평야·우두배꽃
노동요 ‘메나리’·완사계곡 흥미
글 속에 묻어나는 고향 애정
춘천서 많은 시간 생활 짐작
춘곡 형!
형과 내가 서로 만난 지도 벌써 삼 년이 되었소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루를 못 만났는데 봄의 석 달을 다 보낸 듯하다”라고 하였으니 삼 년이면 과연 몇 봄이나 될까요.
춘곡 형!
우리는 춘천 사람이어서 그러한지 춘천의 봄이 항상 그립습니다. 우리 춘천은 군의 이름이 ‘춘천’이니만큼 봄의 경치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매우 아름답지요.
“삼악산은 푸른 하늘 밖으로 반쯤 떨어져 있고/두 강물은 가운데가 나뉘어 백로주라네”
이처럼 칭송한 자연의 경치도 좋거니와 소양정, 조양루는 아마 조선에서 몇째 안 가는 이름난 정자이자 멋진 누각이겠지요. 푸른 버드나무와 향기로운 풀이 우거진 사십 리 평야에 어부들이 고기 잡는 노랫소리와 나무꾼의 피리 소리로 화답하는 것은 그 얼마나 한가합니까. 진달래와 철쭉이 활짝 피고, 온통 푸른 산에 마을 아가씨와 농사짓는 아낙네가 광주리를 들고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산나물을 뜯으면서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형님! 형님! 사촌 형님!/시집살이 어떱디까./시집온 지 삼 년 만에/삼단 같은 이내 머리/다북쑥이 다 되었네”
이 ‘메나리’는 그 얼마나 슬프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느껴집니까. 신연강에 배를 띄우고 지는 해에 석문을 내려가는 흥은 평양의 청류벽을 지나는 것보다 몇 배나 가슴이 벅차도록 시원하지요. 봉황대에 높이 올라 이수삼산을 바라보며 이청련의 옛 글귀를 생각하면 중국의 금릉도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을 것이외다.
춘곡 형!
“배꽃 핀 삼월이면 우두벌이 하얗고/어여쁜 풀 천년에 맥국이 푸르구나”
이 시가 우리 형 향산이 어렸을 때에 춘천 유수영에서 열흘마다 보던 시험장에서 장원한 시구인 것은 형도 아직까지 기억할 것이외다. 그 시와 같이 우두의 배꽃은 참으로 조선에서 제일일 것이외다. 평안남도 영유의 이화정 배꽃은 선조 대왕이 임진왜란으로 피난 갔을 때, 그 아름다움을 칭찬한 까닭에,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는 곳이 관서 지방에서 명성이 높았지요.
하지만 우리 춘천의 우두 배꽃은 그러한 총애는 받지 못하였을망정 누구나 자랑할만한 것이겠지요. 상리·중리·하리 수백여 호가 되는 큰 마을에 집집마다 네다섯 그루 내지 십여 그루의 배나무를 재배하여 늦은 봄 꽃필 때가 되면 천 그루 만 그루 나무에 하얀 눈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듯하지요. 먼 마을과 가까운 마을 모두 환한 달빛이 정결하게 그득하여, 매우 번성하고 화려한 데가 있고 깨끗하지요.
그리고 금병산의 철쭉꽃, 삼악산의 진달래꽃, 청평산의 동백꽃도 옛날과 다름이 없겠지만, 근래에는 경춘선 가도에 벚꽃이 매우 번성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봄빛을 또한 자랑한다지요. 화전놀이도 예전 그대로 변함이 없고, 꽃싸움도 또한 잘들 하는지요. 궁금하고 그립습니다. (중략)
춘곡 형!
다 같은 강원도 사람으로서 영서인 춘천의 봄 이야기만 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합니다. 형도 영동의 봄 구경을 하셨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영동의 봄은 영서의 봄과 정취가 아주 다릅니다. 자연적인 땅의 모양새가 영동 영서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 같이, 봄도 동서가 서로 다릅니다.
영동의 봄을 바다의 봄이라 할 것 같으면 영서의 봄은 산의 봄이오, 영동의 봄을 어부의 봄이라 할 것 같으면 영서의 봄은 농부의 봄입니다. 영서의 봄을 깊은 규방의 처녀에 비한다면 영동의 봄은 호방하고 의협심 강한 소년과 같고, 영서의 봄을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담긴 동양화 한 폭과 같다고 하면, 영동의 봄은 성내며 파도치는 홍수 물결의 서양화 한 폭과 같습니다.
아득히 넓고 큰 바다에 흰 갈매기가 가볍고 날쌔게 날아들고, 부드럽고 고운 모래가 10리나 펼쳐진 바닷가에 해당화가 가득 피었는데, 길게 뻗친 바닷가의 작은 항구에는 고기잡이배가 구름처럼 모여듭니다. “어기엿차” 닻 감는 소리와 북을 둥둥 울리는 소리가 아침저녁으로 끊이지 않고, 잠수경과 쇠코잠방이 차림에 손에는 비창, 배에는 뒹박, 허리에는 망사를 두르고 푸른 바다로 둥둥 떠나가는 해녀의 무리들은 장관이라면 장관이요, 기이한 광경이라면 진짜 보기 드문 기이한 광경일 것입니다.
이 몇 가지는 영서지방의 산이 많은 지역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리고 총석정의 솔바람, 경포의 꽃과 달, 삼일포의 뱃놀이, 금강산의 폭포 구경, 청초호의 물고기 구경, 낙산사의 대숲, 해금강의 파도 구경 등 그 어느 것 하나 가슴이 벅차도록 통쾌하고 뛰어나게 아름답지 아니하겠습니까. 조선의 봄을 구경하는 사람은 이 영동의 봄을 보지 못하고는 감히 조선의 봄을 말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춘곡 형!
금수강산이 좋다고 하여도 이곳에 없으면 적막강산인 것처럼, 관동의 봄이 아무리 좋아도 내가 없고 보니 형도 다소 적막하겠지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고픈 사람들이야 봄인들 어찌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돈 있는 사람들은 자동차에다 맛난 음식과 아름다운 첩을 태우고 꽃구경 다니느라고 호기롭게 우쭐거리며 뽐내지만, 돈이 없는 농촌의 가난한 사람들은 길고 긴 봄날에 밥도 잘 먹지 못하면서도 피땀을 흘리고 농사를 짓지요. 도시의 여자들은 열 손가락을 꼼짝하지 않고도 비단으로 지은 아름다운 옷들을 몸에다 친친 감고 봄철의 경치와 흥을 못 이기어 이곳저곳으로 구경 다니느냐고 분주하지마는, 시골의 여자들은 낮에는 김을 매고 누에를 치며, 밤에도 방아 찧고 바느질하느라고 잠 한숨도 제대로 못 자고 일을 하건만, 배가 고파서 “춘궁춘궁” 하고 근심 걱정 속에 탄식하지요.
이것이 다 무슨 불공평한 일일까요? 하늘님은 공평하여 서울에도 봄이 오게 하고, 시골에도 봄이 오게 하고, 부자의 집에도 오게 하고, 가난한 이의 집에도 봄이 오게 하지요. 반면 인간사회의 제도는 어찌 그리 불공평한가요.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울화가 납니다. 우리의 손으로 한번 좀 뜯어고쳐 볼 수가 없을까요.
▶전문·주석 kado.net
■ 해설
현재까지 알려진 차상찬의 글의 편수는 ▼ 1000여 편에 이른다. 이중에 그가 고향과 강원도에 관해 쓴 글도 상당하다. 하지만 단편적이나마 이 글만큼 그가 균형감 있게 고향의 다양한 이야기를 다룬 글은 드물다.
이 글에서 드러나는 그의 고향에 대한 세세한 언급과 애정을 통해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춘천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선 이 글에 등장하는 ‘춘곡春谷’이란 인물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봄이 온 춘천을 상징하는 가상 인물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정황상 실존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실제 인물을 염두에 두고 호칭만 봄에 맞게 ‘춘곡’이라 지었을 수도 있다.
이 글엔 춘천의 면면이 나온다. 여전히 익숙한 소양정, 조양루, 봉황대, 전계심비 뿐만 아니라, 이젠 의암호 밑으로 사라진 충적평야에 대한 언급이라던가, 지금은 볼 수 없는 우두동의 화려한 배꽃, 춘천 농민들의 노동요인 ‘메나리’, 완사계곡 등에 대한 언급이 새롭다. 춘천뿐만 아니라, 영동에 관한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았다. 이 글이 나온 시기가 1927년이므로, 이미 3년 전 자신의 발로 강원도 곳곳을 누비며 ‘조선문화의 기본조사’를 했던 만큼 영동 지역에 관한 서술도 진지하고 신뢰할 만하다.
봄빛이 곧 익숙해질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은 오봉산이라 불리는 청평산의 동백꽃(생강나무꽃)에 대한 차상찬의 언급이 반갑다. 얼마 전 김유정 선생의 추모식이 끝났다. 두 사람의 인연도 그렇지만, 동백꽃이 피거나 피려는 춘천의 봄이 그래서인지 참이나 아름답다. 이현준
한림대 강사·강원문화교육연구소 차상찬연구팀
발췌문헌=1927년 4월 ‘별건곤’ 통권 제6호
현대어 번역= 강원문화교육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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