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소연]대페미의 시대
이혼소송 남편들 “아내가 페미라” 낙인
혐오 용인 문화가 갈등과 분열 부추겨
이혼소송을 하다 보면 남편 쪽에서 아내의 잘못으로 ‘페미라서’를 드는 경우가 너무 많아, 예를 들어도 누구 일인지 알아볼 사람도 없을 정도다. “내 아내가 남자아이를 평등하게 키우는 방법에 대한 책을 읽었다. 아들을 똑바로 키우지 못할 사람이니 양육권을 주면 안 된다” “딸의 인권에 대한 책을 아내의 책장에서 발견했다. 우리 딸의 사상을 왜곡시킬 것이다”와 같은 주장을 하며 양육권을 다투는 남편도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일면식 없는 쇼트컷 여성을 “페미이니 맞아야 한다”며 폭행해 중상에 이르게 한 범죄도 발생했다. 오늘날 ‘페미’는 사전적 의미의 페미니스트 또는 여성주의자의 약칭에 그치지 않고, 페미니스트에 대한 멸칭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이 멸칭으로서의 ‘페미’에는 몇 가지 구성 요소 내지 판단 기준이 있다. 이 매우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을 보면 “너 페미지?” “쟤가 페미라서” 소리가 나온다. 첫째, 남자를 싫어한다. 남자를 싫어하면 페미다. 여기에서의 남자는 보편적인 남성이 아니라 멸칭 사용 주체로서의 ‘나’가 된다. 아무리 남자 연예인을 좋아해도, 눈앞의 남자인 나를 싫어하면 그 여자는 페미다. 내가 매력이 없거나 연애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연애관계가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저 여자가 페미라는 극단적인 사상에 물들어 남자를 싫어하기 때문에 내가 연애를 못 하는 것이다.
둘째, 머리가 짧고 뚱뚱하고 외모와 꾸밈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내 애인, 아내, 가족 등 내 주변 여성은 페미일 리가 없다. 긴 생머리이고 화장하고 날씬하니까. 이 기준으로 얼마나 많은 남성이 놀랍고도 손쉽게 ‘페미성’을 획득하는지는 알 바 아니다. 페미 여부 판별은 오로지 남자인 내가 여자를 평가하는 일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셋째, 페미는 독서를 많이 한다. 베스트셀러였던 ‘82년생 김지영’ 외에도, 위에서 예로 든 것 같은 성평등 교육을 위한 책, 여성주의자들의 학술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따위를 읽는다. 이런 페미들은 티를 내기 마련인데, 남자인 내 앞에서 감히 똑똑한 척을 하거나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말의 예는 “임신과 출산은 여성에게 더 불이익하다”부터 “성범죄를 예방하려면 남자아이들의 성교육이 중요하다” “명절에 왜 꼭 시가를 먼저 가야 하냐” 등이 있다.
그 외에, 집게손가락 손 모양이나 이모티콘을 사용하거나(남성의 성기가 매우 작다는 의미라고 한다. 저런, 그랬구나!) 데이트통장 만들기를 거부하거나 흡연하거나 성별 동일임금을 주장하거나 살림을 싫어하는 여자들도 페미임을 숨기고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저것 종합해 보면, 한국에서는 여자로 태어나 숨만 쉬어도 페미가 될 수 있다.
이 우스꽝스러운 낙인은 우습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처음으로 돌아가, 나에 대한 기피신청을 한 민원인은 나의 성별과 거짓 정보를 읽을 시간에 기사를 조금만 찾아보았다면 내가 공정한 판단에 무리가 없을 뿐 아니라 특히 자신의 상황에 상당히 도움이 되는 특수한 전문성을 쌓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의 책장에서 성평등 교육 도서를 발견한 남편이 집 안에서 페미를 찾았다며 기겁하는 대신 아내와 대화했다면, 그는 아마 이혼소송의 피고가 되는 결말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자에 대한 혐오를 퍼뜨리는 페미들 때문에 내가 혼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잘 씻고 페미들이 읽는 책도 같이 읽는다면, 함께할 만한 이성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페미에 대한 감별, 혐오 발화에 대한 용인과 때로는 심지어 이를 부추기는 문화가 결국 원인을 잘못 이해한 개인들의 불행, 가정의 갈등과 분열, 사회적 비용, 심지어 범죄로 이어져 우리 모두의 짐이 되는 현실을 보며 생각한다. 어차피 저 모든 기준을 갖다 대면 한국의 모든 여성이 페미이고, 지금이야말로 혐오가 완성한 대페미의 시대인 것을.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변호사·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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