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 밀려올 땐 전집에 가자… 그윽해지거나 사무칠 수 있는[김도언의 너희가 노포를 아느냐]

김도언 소설가 2024. 4. 11.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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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L은 삶이란 가전제품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이라고 시편에서 말한 적 있다.

나는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변용해 봤는데, 삶이란 먹어본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가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먹어야 하는 게 있는 법이다.

그윽해지거나 사무칠 수 있는 곳, 말하자면 거기가 노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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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영동 ‘둘이파전’집의 모둠전과 살얼음 막걸리. 김도언 소설가 제공
시인 L은 삶이란 가전제품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이라고 시편에서 말한 적 있다. 나는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변용해 봤는데, 삶이란 먹어본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가는 것이라고. 나는 이 말이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10대 중에서 홍어삼합을 먹어본 이들의 퍼센티지가 50대 중에서 홍어삼합을 먹어본 이의 그것보다는 낮을 테니 말이다. 어려서부터 산낙지를 먹는 아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먹어야 하는 게 있는 법이다. 어쩌면 노포는 이런 쇄말적인 개인의 연혁을 가장 자연스럽게 채워주는 공간일 것이다.
김도언 소설가
이곳은 서울 지하철 4호선 숙대입구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전집 ‘둘이파전’이다. 정 많은 소설가 K 선배가 소설책을 낸 내게 여기서 낮술을 사겠다는 기별을 주어 바로 지난달 어느 흐린 오후에 가본 곳이다. 전집 분위기는 1990년대까지 존재하던 학사주점을 연상케 한다. 인근에 대학이 있으니 시나브로 그런 정서가 이입됐을 것이다. 사장님 말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 장사한 지 20년 됐단다. 주메뉴는 모둠전과 골뱅이소면무침. 전집이라면 빠뜨릴 수 없는 필수 아이템이라 할 만하다. 신선한 재료로 부친 전은 간이 알맞고 골뱅이소면무침은 침샘을 끊임없이 자극할 정도로 폭발적인 감칠맛을 뽐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이상적인 입자로 이루어진 살얼음 막걸리였다. 막걸리 슬러시라고 해도 좋을.

함께한 소설가 S 선생과 더불어 흐린 날 학사주점을 닮은 노포 전집에서 세 명의 글쟁이들이 바란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단 한 가지였으니 비의 강림이었다. 막걸리는 살얼음이 녹을 새 없이 금세 비워졌고 소설가들의 이야기도 구성졌다. 문단에서 서로 좋아했다가 헤어진 사람들 이야기, 원고지 밖으로 너무 멀리 나간 작가들 근황으로 분주했다. 그러다 막걸리 주전자가 다섯 개쯤 비워졌을 때였을까. 드디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기적 같은, 축복 같은 비였다. 웃자란 소설가 셋이 어린아이처럼 탄성을 내질렀다. 어느 순간엔 비가 내려서 전과 막걸리를 먹고 있는 건지, 전과 막걸리를 먹어서 비가 오는 건지 대관절 무심해지고 말았다. 거기에 젊은 손님들은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조근조근 술을 마셨다. 빗소리를 삼키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를 낮추고 잔을 나눴다. 나는 이게 이 집이 만든 풍속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삶이란 먹어본 음식의 가짓수가 늘어가는 것이라는 나의 가설은 옳을 가능성이 높다. 비 오는 날 기름 번지르르한 전에 막걸리 한잔하는 관습에 사람들은 언제 참여하게 됐을까. 대개가 성인식을 치른 20세 직후가 아닐까. 어쩌면 그날 그 자리엔 그 역사를 시작한 젊은 친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체험의 서막이 열리는, 삶의 한 페이지가 채워지는 장엄한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셈이다. 거기에 부침개와 막걸리는 찰지게 맛있고 올동말동 하던 비까지 내렸으니 이게 장엄한 일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장엄이란 말인가.

서쪽 하늘에서 먹구름이 밀려오는 저녁이면 남영동 전집엘 가보자. 누구든 이곳에서 홀로 그윽해지거나 연인 또는 친구와 깊이 사무칠 수 있다. 그윽해지거나 사무칠 수 있는 곳, 말하자면 거기가 노포다.

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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