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대통령의 위기, 민주당의 위기
총선에서 집권당이 이처럼 참패한 적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세력을 국민들이 사실상 탄핵한 결과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초유의 위기 상황이다. ‘위기’란 한자말은 ‘위험’과 ‘기회’가 상존함을 의미한다. 국민들이 사실상의 탄핵을 왜 선택했는지를 냉철히 돌아봐야만 위험에서 기회를 찾을 수 있다.
검사 시절에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과 권력의 압박에 굴복하지 않는 자세는 ‘검사 윤석열’을 ‘대통령 윤석열’로 만든 기초자산이었다. 대통령 선거기간에 드러난 ‘준비되지 않은 대통령’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국민들의 믿음과 기대로 말미암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2년간 윤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여준 것은 ‘자신에게 충성만 하는’ 사람을 등용하고 독선적으로 통치만 하려는 모습이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가 독선·불통·오기였으며, 이런 대통령과 추종만 하는 참모, 장관, 국민의힘이 경제도 외교도 모두 망가뜨렸다고 국민들이 판단한 것이다. 또 김건희 여사 의혹이나 채모 상병 사건 조사 과정에서, 윤 대통령의 정의가 얼마나 선택적 정의였는지를 목도했다. 국민적 지지를 받았던 의대 정원 확대도, 독단적 통치 행위가 정책 집행 과정에서 부각되면서 오히려 국민적 불안과 불신을 불러왔다.
윤 대통령이 총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환골탈태하는 변화를 보여주지 못하면, 더 큰 위험을 본인이 자청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을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우선, 당적을 정리하고 중립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또한 대통령실도 전면개편하는 인적쇄신을 단행해야 한다. 차기 대선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고 중장기적 비전과 전략을 세울 수 있는 인사를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외교 및 국방을 제외한 중립내각에 대한 실질적 제청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한국 사회와 경제는 제조업 위기, ‘양극화-저출산-노인빈곤’과 같은 사회 위기, 탄소중립으로 이행 위기, 미·중 대립과 공급망 재편 등 지정학적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 결과가 아직 쉽게 인지될 정도로 나타나지 않고 있기에, 정치권은 이를 정치 의제화하기를 꺼린다. 어려운 문제이고 대응엔 많은 사회적 비용과 갈등이 야기될 수 있어서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룬다면, 한국 사회와 경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파멸적 결과를 맞이할 것이 분명하다. 윤석열 정부가 남은 3년 동안 이에 천착해 경제·사회적 구조 개혁과 필요한 입법을 추진한다면, 윤 대통령에게도 대한민국에도 이번 총선은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총선에서 압승한 더불어민주당에는 기회의 창이 열렸다. 그러나 민주당이 좋아서 국민들이 표를 몰아줬다고 생각한다면, 헛다리를 짚는 것이다. 민주당이나 조국혁신당 역시 총선 기간 동안에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지 못했다. 선거운동 기간에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채소 가격이 오른 제일 큰 이유는 전기요금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전기요금이 신선물가 급등의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전문가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RE100 국가’를 총선 기후공약으로 내건 민주당의 입장과 상충된다는 점이다. 전기요금을 원가 이하로 억누르는 정책은 재생에너지 확대에 장애가 되고, 궁극적으로 탄소중립 이행에 걸림돌이 된다.
대기업 노동자 임금 동결과 이를 위해 대기업에 세제혜택을 주자는 조국혁신당의 사회연대임금제도 황당무계한 공약이었다. 그러나 전속적 하청구조에서 발생하는 단가후려치기와 기술탈취 그리고 이로 인한 중소기업-대기업 임금격차 심화라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 당위론적 처방에 매몰되어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우리 정치가 여야 가릴 것 없이 한국 경제의 근본적·구조적 문제는 도외시하고, 당장에 국민들에게 재정 지원을 늘리고 세금을 깎아주는 매표 정책경쟁에 매달려 왔음을 이번 총선 기간에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압도적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정부의 실정에만 기대고 미래에 대한 비전과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민주당은 다음 대선에서 외려 국민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 여당 주류가 합리적·개혁적 보수로 교체될 경우 더욱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총선 이후 외려 정치가 한국의 미래를 집어삼키는 최악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 있다. 밀리기 싫어하고 독선적인 윤 대통령이 선거 사범, 이재명 대표 사법처리 등을 빌미로 사정정국으로 국면전환을 꾀하고, 야당과 정부가 대립하고 정쟁과 매표경쟁에 매몰되었던 제21대 국회 상황이 반복될까 걱정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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