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심판의 날, 그 이후
“사과 3박스 사놨어요. 총선 끝나면 가격이 다시 오르지 않겠어요?”
최근 만난 지인은 사과를 깎아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한 대형할인마트에서 3월 초 사과 10㎏에 9만~10만원 하던 게 4월 초에는 6만~7만원으로 내렸길래 3박스를 ‘득템’했다고 했다. 정부 할인쿠폰은 1인 한 번만 적용된다고 해 가족 명의 전부를 동원했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시민들이 정부 머리 위에 있다고 봐야 한다. 최근 사과 가격 하락이 시장의 결정이 아닌 총선을 앞둔 정부의 한시적인 미봉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얘기다.
4·10 총선이 범야권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번 민심의 선택은 ‘정권심판’이었다. 여론의 중심에 사과와 대파로 표현된 ‘민생’이 있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심판은 내려졌지만, 사실 걱정은 지금부터다. 11일 국가결산 보고를 시작으로 그간 총선을 이유로 여권이 미뤄놓은 혹은 약속한 경제 청구서들이 줄줄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당장 관심은 밥상물가다. 지난달 사과와 배, 대파 등 과일과 양념류 가격이 폭등하자 정부는 물가안정책이라며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비축물량을 대폭 시중에 풀었다. 정부의 할인쿠폰에 대형유통사 자체 할인, 신용카드사 결제할인까지 더해지며 대형할인마트에서 판매되는 주요 과실의 소매가격이 큰 폭으로 떨어졌다. 사과 등 일부 품목은 소매가가 도매가보다 낮아졌고, 대형마트 판매가격이 전통시장 판매가격보다 낮아지는 상황도 벌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들이 물가안정을 체감할 수 있을 때까지 자금을 ‘무제한 무기한’ 투입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1500억원 이상을 써버린 상태에서 재정적으로 그럴 여력이 있는지, 정치적으로 그럴 유인이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신선과실 가격은 오히려 하반기로 갈수록 더 불안해질 수 있다. 가격을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면서 가수요가 생겼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비축분을 과도하게 풀면서 하반기 물량 공급이 원활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총선을 앞둔 물가안정 조치의 부작용이 시차를 두고 하반기에 도드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의 강력한 물가안정 기조에 가격 인상을 자제했던 가공식품 업체들도 한계점이 점차 다가온다는 우려가 나온다.
건설업계에서는 4월 위기설이 나온다. 총선이 끝난 뒤 그간 눌러놨던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장의 부실 위험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우려는 끊이지 않았다. 국토교통부 자료를 보면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 물량은 7개월 연속 증가하고 있다. PF 대출잔액은 1년 전에 비해 증가했고, 연체율도 상승하고 있다. 이달 말에는 상당액의 PF 만기가 도래한다. 일각에서는 시스템 리스크가 커지지 않기 위해서는 고름(위험요소)을 짜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태영건설 때처럼 정부가 적극 개입해 사태 해결을 주도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시장은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 전반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상반기 집중된 재정지출 약발이 끝나면 자산 가격이 부정적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11일 코스피는 장중 한때 2700이 붕괴되고 원·달러 환율은 심리적 지지선인 1360원을 돌파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정부가 총선을 우려해 공개를 미룬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던 장부는 예상대로 어두웠다. 이날 기획재정부가 공개한 ‘2023 회계연도 국가결산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관리재정수지는 87조원 적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지난해 경기부진에 감세가 겹치면서 정부 수입이 대폭 줄어든 것이 재정건전성에 영향을 미쳤다.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재정을 활용해 경기를 부양할 여지는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총선 때 정부가 저출생·사회간접자본(SOC) 투자 확대 등 남발한 공약은 첩첩이 쌓여 있다. 부산대병원만 해도 병동신축비 7000억원을 전액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같은 공약을 추진하거나 혹은 거둬들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혼란이 생길 수 있다.
총선에 졌다지만 정권을 운영할 힘은 여전히 윤석열 정부가 갖고 있다. 임기는 3년이나 남았다. 그 시간은 대한민국이 반등하기에도, 추락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지금이라도 국정을 제대로 쇄신한다면 윤석열 정부의 최종 성적표는 달라질 수 있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쇄신하느냐다. 혹독한 심판을 받은 정부가 스스로 풀어야 하는 숙제다.
박병률 콘텐츠랩부문장 겸 뉴콘텐츠팀장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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