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엔비디안과 삼성맨

최지희 기자 2024. 4. 11.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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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미국 엔비디아 본사 엔지니어들은 벽 없이 탁 트인 2300㎡(약 695평) 사무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직원 누구나 볼 수 있는 화이트보드엔 회의 내용이 실시간 공유됐다. 직원 수가 3만명인 대기업인데도 여느 스타트업처럼 회사 정원, 카페테리아, 계단 등 곳곳에서 난상토론이 이어졌다. 인공지능(AI) 시대 핵심 경쟁력인 ‘협업’과 ‘개방’이 회사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다. 엔비디아는 연중 네 차례 광장처럼 넓은 회사 공용 공간에 인턴부터 경영진까지 수백명이 모여 중장기 목표를 논의한다.

엔비디아는 최근 미 포천지가 선정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 3위에 올랐다. 여기에는 직원들이 협업해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도록 장려하는 ‘수평적 구조’가 핵심 요인으로 꼽혔다. 엔비디아 직원 97%는 엔비디아에 근무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답했다. 미국 기업 직장인들의 응답 평균치는 57%에 불과하다.

엔비디아의 조직도를 보면 피라미드 계층이 아닌 컴퓨팅 스택처럼 그때그때 명확한 임무에 따라 직원들의 역할이 정의된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미션(임무)이 당신의 보스(상사)’라는 말을 자주 한다. 직원들이 일하는 데 운신의 폭이 넓다는 의미다. 신입 직원의 아이디어가 리더에게 쉽게 전달되고, 직급과 관계없이 주요한 프로젝트에 투입돼 성과를 낼 수 있는 구조다. 인도 출신의 한 4년차 엔비디아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는 “일이 쏟아질 때도 많지만, 의사 결정자인 엔지니어링 리더들과 바로바로 소통하면서 일할 수 있어 진행 속도가 빠르고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쉽다”고 말했다.

엔비디아 본사 직원들은 연차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엔비디안(Nvidian)’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그 일원이라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엔비디아에 17년간 몸담은 마케팅 담당은 “직원 각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면 쓸모없는 시간을 없앨지, 어떻게 하면 비용을 줄일지, 어떻게 하면 신기술을 개발할지 의견을 낸다”고 했다. 책임자는 이런 의견을 토대로 빠르게 개선 지시를 내릴 수 있게 된다.

한국 기업에선 이런 모습이 아직 낯설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인 삼성전자조차 관료화된 조직문화 때문에 시장 수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나온다. 전통적으로 메모리 반도체에서만큼은 ‘퍼스트 무버’였던 삼성전자가 AI 반도체가 급부상하기 시작한 2020년대 들어 시장 트렌드에 뒤처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의 한 직원은 “경영진과 엔지니어 조직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서로 엇박자를 내면서 시장의 신뢰를 잃은 면이 있다”며 “직원들이 의견을 내도 윗선에서 듣지 않으니 되든 안 되든 시키는 일이나 하자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고 했다.

실제 삼성전자는 AI 시대 핵심 반도체로 떠오른 HBM(고대역폭메모리) 시장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주도권을 빼앗겼다. 시장에서 최소 1~2년 앞서나가던 고성능 D램 미세공정에서도 경쟁사에 추월을 허용했고, 첨단 패키징 분야도 상황은 비슷하다. 삼성전자 직원들 사이에선, 한때 혁신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던 ‘삼성맨’들이 새로운 변화의 시기에 과거 성공 공식을 답습해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삼성전자 반도체 수장 경계현 사장은 과감히 도전하는 조직문화를 만들겠다고 2년 전부터 수차례 공언했다. 그러려면 직원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고, 주도적으로 행복하게 일하는 조직이 돼야 한다는 처방도 내렸다. 관료화된 메모리 중심 서열 문화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수십 년간 뿌리 깊게 자리한 문화를 혼자 단번에 바꾸긴 쉽지 않은 일이다. 수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해내야 하는 과업이라는 그의 말이 메아리에 그친다면, 주인의식을 가진 젊은 삼성맨을 찾기 어렵다는 자조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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