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책임지는 선관위원장이 보고 싶다
나날이 복잡해지는 선거관리 업무
‘파트타임’ 위원장으론 대응 한계
현직 대법관 겸임 관행 개선해야
4·10 총선 사전투표소에서 한 어르신이 계단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지하 투표소까지 못 내려가겠다고 한다. 담당 공무원이 “1층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할 테니 걱정 마시라”고 안심시켰다. 관외 사전투표를 마치고 나오는데 어르신 얼굴이 눈에 밟혔다. 직원 도움으로 기표소에 들어갔어도 그다음은 어떨까. 떨리는 손으로 지지 정당 옆 비좁은 네모칸 안에 정확히 스탬프를 찍을 수 있을까. 필자도 51.7㎝ 길이 투표용지를 봉투에 넣기 위해 접으며 ‘이러다 무효표 되는 것 아닌가’ 싶었는데 어르신들은 오죽하겠는가. 요즘 같은 초고령화 시대에, 또 온갖 비례정당이 난무하는 혼돈기에 선거관리위원회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한다.
사정이 이런데 우리 선관위의 모습은 실망스럽기만 하다. 얼마 전 선관위는 총선 재외선거 투표율을 부풀렸다가 망신을 샀다. 세계 각국 재외국민들의 투표 참여가 저조해 관련 예산 삭감이 우려되자 통계 분식을 시도한 것이란 지적이 제기됐다. 유튜버가 전국의 총선 투·개표소를 돌며 불법 카메라를 몰래 설치한 사실도 선관위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선관위 사무처 핵심 간부들의 자녀 특혜 채용 의혹은 또 어떤가. 관리 책임자인 선관위원장은 대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묻게 된다.
현직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겸임하는 관행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1988∼1989년 선관위원장을 맡은 이회창 전 대법관은 회고록에서 “(대법관들 사이에) 선관위원장은 모두 가기를 꺼려 하는 자리였다”고 술회했다. 이어 “대법관 업무 외로 겸직하는 자리인데도 대법관의 사건 배당에 이를 전혀 참작하지 아니해 업무 부담이 컸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요즘은 그때보다는 사정이 좀 나아졌다. ‘대법원 사건의 배당에 관한 내규’가 개정돼 선관위원장을 겸하는 대법관은 선거일이 임박하면 사건 배당을 절반으로 줄여준다고 한다. 그래도 선관위원장이 상고심 사건 기록과 씨름해야 하는 현실은 그대로다. 회사는 경기 과천에 있는데 정작 그 사장은 서울 서초동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다면 그런 회사가 발전할 수 있겠는가.
선관위원장 임기가 너무 짧은 것도 한계다. 헌법에 따르면 선관위원장은 6년간 일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선관위원장을 지낸 인사 9명의 재직 기간 평균을 내보니 약 29개월에 불과하다. 대법관 임기가 끝나는 순간 겸임하던 선관위원장직도 내려놓으니 그렇다. 애초 선관위원장에게 책임지고 선관위 조직을 이끄는 자세를 요구하기 힘든 구조다.
현직 대법관이 선관위원장을 맡아 온 것은 그냥 관습일 뿐이다. 오늘날 선거관리 업무의 복잡성과 중요성을 감안하면 더는 선관위원장을 ‘파트타임’ 직위로 둘 수 없다. 헌법 개정 없이도 전직 대법관이나 전직 헌법재판관 등 중량급 법조인을 선관위원장에 앉히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게 하면 과천과 서초동을 오가며 선거관리와 상고심 재판을 병행하는 곤란함에서 벗어나 오롯이 선거관리 임무에만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의 전향적 검토를 촉구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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