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자녀에게 자랑스러운 정치

민병권 논설위원 2024. 4. 11.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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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규범 벗어난 ‘부적격 후보’ 속출
아이들 ‘부끄러운 정치’ 볼까봐 우려
고심 끝에 최악 피해 차악 후보 선택
국회 낮은 자세로 일해야 상식 복원
[서울경제]

“내가 쉰 살 넘게 살아오면서 후회하는 것 세 가지가 있지. 첫째는 집값이 떨어진다고 믿고 주택 구입을 망설인 것, 둘째는 공교육만 믿고 애들 사교육을 덜 시킨 것, 셋째는 정치가 좋아질 것으로 믿고 꼬박꼬박 ○○당에 투표했던 것이야. 세 가지 모두 오판이었지.”

고교 동문 중 자수성가한 인물로 평가받는 선배 A 씨가 막걸리를 들이키더니 한숨을 토해냈다. 명문대 졸업 후 고연봉 전문직에 투신했고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 동문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사던 선배였다. 그런 그가 최근 친목 모임에서 던진 넋두리에 동석한 사람들은 “배부른 소리”라며 핀잔을 줬다.

그러나 필자는 A선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올곧은 성품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도 도덕 선생님처럼 살았던 그였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상식과 규범에 맞춰 바르게 살았을 것이다. 남들이 ‘갭투자로 집을 사서 몇억 원 이상씩 벌었다’고 할 때도, ‘누구 자녀가 어느 유명 강사에게 과외를 받고 명문대에 골인했다’고 할 때도 말이다. 그런 A선배가 “모두 오판이었다”고 내뱉은 말에는 상식과 규범에 대한 깊은 배신감이 배어 있었다. 이런 사람이 A선배뿐이랴. 이번 22대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던진 한 표 한 표마다 ‘새 국회에서는 제발 상식과 원칙을 복원해달라’는 호소가 담겼을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보편적 상식과 사회규범은 존재한다. 국민들이 이 같은 상식과 원칙을 존중하고 따를 때, 특히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할 때 그 나라는 번영했다. 로마는 무려 기원전 450년 무렵 평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문법인 12표법을 명문화했다. 관습적으로 전승됐던 사법적 인신 구속 요건과 재산·가정 문제를 비롯해 여러 규범을 명문화한 것이다. 이는 리키니우스법 등으로 이어졌으며 동로마제국의 로마법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1000년 동안 각종 사회규범으로 한층 정교하게 발전했다.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이 규범과 법률들을 동일하게 적용함으로써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조선도 건국 초기부터 유교를 그 시대의 도덕적 준거로 받아들였다. 유교 이념을 근간으로 경국대전을 편찬해 500년 왕조의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로마와 조선에서 모두 중후반으로 갈수록 법치와 규범은 무너졌다. 그 결과 사회적 결합력은 약화됐고 외국의 침입을 허용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시민들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의 보편적 규범과 상식이 무너질 수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10일 치러진 22대 총선은 이 같은 위기감을 실감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여야는 부끄러움도 없이 수많은 전과자들을 국회의원 후보로 내세웠다. 글로 쓰기에도 부끄러운 막말을 쏟아낸 사람도 천연덕스럽게 한 표를 달라고 유세했다. 부동산 투자를 죄악시하던 당에서는 편법 대출 의혹이 불거진 후보를 내세워 끝까지 밀어붙였다. 자녀 입시 비리로 2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인물이 창당한 뒤 대입 기회 균등을 공약하기도 했다. 학교와 사회에서 배웠던 윤리와 원칙이 공공연히 도전받는 모습에 유권자들은 인지 부조화를 느꼈을 것이다.

최근 한 선배가 사석에서 “그동안 투표할 때마다 아이들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녔는데 이번 사전투표를 할 때는 처음으로 아내하고만 갔다. 아들들에게 보여주기 부끄러운 후보들뿐이어서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좌중에서는 “그래도 ‘뭐’ 묻은 개보다는 ‘겨’ 묻은 개라도 있는 게 어디야. 차악이라도 찍어줄 선택지가 있는 게 아직은 다행”이라고 다독이는 사람도 있었다.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후보들을 놓고 선택해야 했던 유권자들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유권자들이 꿋꿋이 투표소를 찾아 투표율을 올렸다. 최악이 당선되는 것은 막자는 생각으로 말이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후보들은 헤아리기 바란다. 자신이 잘나서 당선된 것이 아니라 차악이라도 찍을 수밖에 없는 유권자의 ‘고심 끝 선택’ 덕분이었음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22대 국회의원 당선인들이 낮은 자세로 나라와 지역을 위해 몸을 던져 일해야 우리 사회의 규범·원칙과 상식의 정치가 복원될 것이다. 그래야 유권자들도 자녀들에게 자랑스럽게 우리의 정치를 보여주고 가르칠 수 있다.

민병권 논설위원
민병권 논설위원 newsroo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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