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점진적 방법으로 이뤄진 변혁
4년간 각국 혁명사가들과 진행한 ‘혁명비교연구’의 출판이 이뤄진다(2023년 1월19일자 본 칼럼 ‘한국혁명’ 참조).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고치고 결론을 새로 쓰다 보니 ‘점진적 대변혁’이란 메이지유신의 특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중국과 조선이 일찌감치 군현제로 전환한 데 반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까지 봉건제로 남아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 대다수 지식인들은 봉건제가 좋은 제도라며 일본 예찬 소재로 삼았다. 19세기 중반 서양의 위협 앞에서 중앙집권을 해야 할 필요가 대두하자, 그들은 일본도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낯선 서양 정치사상을 수입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보단 봉건제-군현제라는, 동아시아에서 장구한 세월 그 장단점이 논의된 낯익은 정치제도에 관한 토의를 정치체제 변혁의 단서로 삼은 것이다.
민두기의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청에서도 의회제 도입과 지방분권을 논의하면서, 그것은 현행 군현제에 봉건제를 가미하는 것이라는 논법을 사용했다(<중국근대사연구: 신사층의 사상과 행동>). 내가 보는 한 같은 시기 일본에서의 봉건-군현 논쟁은, 청의 그것보다 더 치열했으면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청에서는 초강력 군현제에 봉건제의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 과제가 된 반면, 거꾸로 일본에서는 장구한 역사의 봉건제를 아예 군현제로 바꾸려는 혁명적 시도가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봉건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건재하고 그 가신단인 사무라이들이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는 사회에서 군현제 도입은 곧 그들의 존재기반을 허무는 일이었다. 예상되는 반발을 회피하기 위해 점진적 방법이 모색되었다. 유신을 주도한 4개 번은 왕정복고 직후 천황에게 판적봉환(版籍奉還)을 청원한다. “지금 삼가 그 판적(版籍·토지와 백성)을 거두어 바치니 원하옵건대 조정의 사정에 맞추어 줄 만한 것은 주고 빼앗을 만한 것은 빼앗아, 부디 열번(列藩)의 봉토에 조명(詔命)을 내리어 이것을 새로 정해 주시길 바랍니다.”(<판적봉환 상표문>) 왕정복고는 반드시 군현제 수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막부하의 봉건에서 천황하의 봉건’으로 바뀌는 것이라는(것이면 좋겠다는) 논법이다. 천황정부는 판적은 수리했으나 다이묘를 번지사(藩知事)로 남겨두는 절충적인 선택을 했다. 명실공히 군현제로 이행한 것은 폐번치현(廢藩置縣, 1871) 때다. 당시 군현제에 대한 반발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당시인들에게 군현제는 신분제 철폐를 의미했다. 일본인들이 볼 때 군현제의 중국은 신분과 세습이 없는 ‘위아래도 모르는’ 사회였다. 군현론자들은 이 난관을 어떻게 돌파했을까.
당시 일본인들에겐 서양이 새로운 모범으로 비치기 시작했는데, 군현론자들은 높은 문명을 이룬 “서양 각국은 모두 군현”이라는 인식을 전파했다. 프랑스를 방문 중이던 다케우치 야스노리(竹內保德)는 마르세유에서 리옹으로 가는 길에 남아 있는 성곽들을 보며, 프랑스도 봉건은 흔적만 남고 군현제를 수립했다 했고(<歐行日記>), 막부 최후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도 영국이 과거 봉건제를 택했으나 강국이 되레 군현제를 도입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丁卯日記>). 또한 그들에게 군현제는 신분 타파, 인재 등용, 능력주의를 실현할 매력적인 제도로 점점 인식돼갔다. 군현제가 수립되면 “공경(公卿)이나 문벌이라 해서 높은 관위를 차지하지 않으며, 덕망재간이 뛰어나 천하 사람들이 의지할 만한 자라면 평민 중에서라도 선발”해 중책을 맡기는 사회가 되리란 것이다(<淀稲葉家文書>).
메이지유신 과정을 관찰해보면 이렇게 전통적인 정치자산을 활용하여 점진적, 절충적인 경로로 변혁을 진행시켰음을 알 수 있다. 왕이나 다이묘를 단두대에 보내는 일도, 민중이 대규모의 폭력을 행사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점에서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과의 차이는 분명하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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