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실‘문학’, ‘공공광장’으로 이끈 손택수 시인 [경기 작가를 만나다 ③]
그늘진 문학관, 공적 맥락 속 연결 숙고
“지금, 문학 갱신되고 사유 던질 시기”
‘머뭇거릴 섭(囁)’자가 쓰여진 하얀 도화지가 하얀 벽지에 걸려 있었다. “머뭇거리다 보면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선입견이 작용하지 않아 습관적으로 말하지 않게 돼요. 자기성찰로서의 정지이지요. 말하기 보다 듣는, 시는 ‘섭’의 작품입니다. 그래서 여백이 많아요. 활자와 활자 사이의 여백, 그걸 가능케 하는 게 시입니다.”
초봄의 어느 날 화성시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실에서 만난 손택수 시인(54)이 말했다. 시와 문학에 대한 자기 주관을 행동으로, 삶으로 실천하는 사람. 오죽했으면 ‘자기성찰로서의 정지’를 담아낸 ‘머뭇거릴 섭’이란 시를 지었을까.
손택수 시인은 2013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한 인연으로 2018년 제2대 노작홍사용문학관장에 취임했다. 그는 관장실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노작의 묫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노작을 곁에 둔 건 제 삶에서 큰 행운이라 생각해요. 하나의 문학적 거울을 들고 삶을 계속 성찰하면서 살아나 갈 수 있거든요.”
그는 문학이 문학으로만 갇혀 있는 게 아닌, 문학이란 밀실의 장르를 공공의 영역으로 어떻게 옮길지 고민하는 작가다. 노작문학관에 6년간 있으면서 노작의 이름, 또 외지고 그늘진 곳에 있는 문학관이란 이름이 어떻게 공적인 맥락 속에서 연결될지 늘 숙고해왔다.
정답은 노작의 삶에서 찾을 수 있었다. 노작은 활동하던 일제강점기 당시 문맹률이 80%에 달하는 현실에서 민중과 출판이 소통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이에 연극, 음반 등 다양한 영역과 연계하며 문학을 대중에게 알리려 했다.
손 시인이 전국 극단 50곳이 참여하는 ‘창작단막극제’를 문학관에서 시행한 것도, 싱어송라이터 등 우리 시대 가난한 예술가를 문학이 돕고자 시도한 최초의 문학상 ‘음유시인문학상’을 도입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기존의 ‘문학=문학’이란 고립된 카테고리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안’을 노작의 삶을 통해서 제출했다.
무용(無用)한 것들, 정지한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사랑하는 소년이던 그는 “유별난 성장통을 겪고 자연스럽게 문학을 만나” 시를 쓰게 됐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으로 등단해 시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2022)’, ‘붉은빛이 여전합니까(2020)’,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2014)’, ‘나무의 수사학(2010)’, ‘목련전차(2006)’, ‘호랑이 발자국(2003)’, ‘나의 첫소년(2017)’, ‘한눈 파는 아이(2019)’ 등 작품활동을 쉬지 않고 이어오면서도 문학 제도의 곳곳을 바쁘게 누볐다.
“풀이 흔들리는 것만 보고도 하루가 갔다”, “폐쇄적인 인간이었다”고 스스로를 밝혔지만, 사실 한국 출판 분야의 변혁점엔 늘 그가 있었다.
20대엔 부산에서 무크지와 계간 종합문화지의 창간에 실무자로 참여했고 이후 생태전문 문예지의 창간 멤버로 활동했다. 30대 중반 이후 활동 영역을 지역에서 수도권으로 옮겨오면서 장편소설 전문 계간지의 창간에 밑그림을 그렸다. ‘실천문학’의 기획과 편집에 중심 역할을, 40대 이후엔 일터인 노작홍사용문학관에서 근대문학의 성좌들이 모여있는 ‘백조’를 복간시켰다.
‘성장 소설은 있는데 성장 시는 왜 없을까. 윤동주 시인의 ‘소년’과 같은 좋은 성장통이 있는 시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국내 처음으로 청소년 시, 성장 시의 개념을 선보인 것도 그다.
“오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시가 휴식처가, 책 읽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시 한편 읽으면 성장하는 느낌을 가지면 좋지 않겠느냐” 작가들을 설득했다. 참여한 작가들과 대여섯 곳의 출판사가 연대해 독자와 만나는 하나의 작은 문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문학을 매개로 한 국제 교류에도 활발히 역할을 했다.
지난해 경기문화재단의 ‘2023 경기 문학작가 확장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된 것 역시 끝없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대중에 문학의 세계를 알리려 부단히 노력했던 바탕이 있었다. 문학이 공공성을 가지고 독자와 만나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것들을 꾸준히 고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손 시인은 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문학의 힘을 내다봤다. 생태주의 담론에서 지나 기후변화의 시기를 맞이한 현재의 담론은 또 다르기에. 그리고 그 지점에 문학의 역할이 분명히 있기에.
그리고 그는 여전히, 앞으로도 실용과 관계없는 것들을 추구하고 실용성의 세계를 반성하며 쓸모없는 질문을 이어나갈 거라 했다. 이 질문들이 멈출 때 시인은 심장 박동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명 전환기인 지금이야말로 문학이 갱신되고 자기 형성의 사유를 치밀하게 던지는 시기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문제적 상황에서 문학이란 뭐고 우린 어떤 작품들을 제출할 것인가, 이런 작가들의 고민이 그 어느 때 보다 치밀하게 일어날 것 같아요. 저 역시 앞으로 써나갈 시를 통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풀어나갈 겁니다.”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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