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받지 않은 전범', 코코 샤넬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코코 샤넬(1883~1971ㆍ프랑스)과 마리 로랑생(1883~1956ㆍ프랑스)은 20세기 초 유럽에서 매우 유명한 여성이었다. 샤넬은 당대 가장 성공한 패션 디자이너였고, 로랑생은 파리의 잘나가는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일찍이 입체파에 잠깐 발을 담갔던 로랑생은 곧 파스텔 색조를 활용해 부드럽고 섬세한 여성스러움을 표현한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했다.
로랑생은 한때 러시아 발레단 ‘발레뤼스’에서 무대 미술을 담당했는데, 그곳에서 무대 의상 일을 하던 동갑내기 샤넬을 만났다. 당시 샤넬은 로랑생에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고, 이렇게 탄생한 것이 <마드모아젤 샤넬의 초상>(1923)이다. 그림 속 샤넬은 푸른색 드레스에 길게 늘어트린 검정 스카프 차림새다. 오른쪽 팔을 올려 머리에 대고 포메라니안 강아지를 무릎에 앉힌 채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다. 어깨와 오른쪽 가슴이 노출돼 있어 관능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연약하고 창백한 피부색, 공허한 눈빛의 샤넬은 다소 지치고 우울해 보인다.
샤넬은 독립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가진 여성이었다. 아름답고 날씬한 체격의 그녀는 만 레이(Man Ray)를 비롯한 당대의 저명한 사진작가들이 찍어준 사진에서 항상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강렬한 카리스마를 내뿜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아무래도 자신의 이미지와 거리가 먼, 침울한 표정의 이 초상화는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 로랑생은 샤넬을 강한 여성보다는 섬세하고 우아한 여성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샤넬은 자신과 닮지 않았다면서 초상화 수정을 요구했다. 로랑생은 몹시 불쾌해하며 응하지 않았고, 샤넬에게서 끝내 그림값을 받지 못했다.
샤넬은 이 초상화를 왜 그렇게 싫어했을까? 어쩌면, 로랑생은 우아한 가면 뒤에 숨어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샤넬의 진정한 내면을 포착했는지도 모른다.
샤넬은 패션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혁명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코르셋을 없애 여성의 몸을 해방시켰고, 장식이 많은 거추장스러운 의복 대신 활동적이고 편안한 옷을 만들었다. 땅에 질질 끌리는 치렁치렁한 드레스의 밑단을 과감하게 자르고 발목이 보이도록 짧게 줄인 스커트와 바지, '리틀 블랙 드레스', '샤넬 수트'로 현대적인 여성복 시대를 열었다. 그녀는 의상뿐만 아니라 퀼팅 핸드백, 메릴린 먼로가 뿌리고 잤다는 샤넬 No.5 향수, 화장품, 구두, 액세서리를 망라하는 샤넬 패션 제국을 이룩했다. 패션계의 정상에 오른 샤넬은 부와 명성을 누렸고, 장 콕토,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등 예술가, 음악가, 작가들의 연인이자 후원자였으며, 처칠 같은 유럽의 명사들을 친구로 삼았다. 평생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화려하고 역동적인 삶이었다.
그러나 이 빛남은 샤넬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녀의 인생 초반은 매우 어두웠기 때문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샤넬은 어머니 사망 후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두 여동생과 함께 수녀원에 딸린 보육원에서 자랐다. 10대 시절, 낮에는 재봉사로 일하고 밤에는 카바레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플레이보이 백만장자 에티엥 발상의 정부가 된다. 그의 도움으로 모자 가게를 열었고, 이후엔 영국인 사업가 아서 카펠, 영국의 거부 웨스트민스터 공작 등 돈과 지위를 가진 남성들의 후원을 받으며 사업을 확장하고 성공 가도를 달렸다. 샤넬은 상류층 남성들이 그녀에게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을 자신의 야망을 위한 든든한 배경으로 활용했다.
부유한 남성의 정부로 산다는 것은 호화로운 저택, 사냥, 폴로 게임, 연극과 발레 공연을 즐기는 여유로운 삶을 의미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벨 에포크(Belles Époque: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에는 드미몽드(Demi-Monde)의 세계가 존재했다. 드미몽드는 상류층 남성의 정부 노릇을 하며 재정적 후원을 받는 당시 프랑스의 고급 매춘부를 지칭한다. 하류층 출신으로 인생의 숱한 장벽을 넘어 성공한 샤넬은 늘 자신의 비천한 뿌리와 비밀에 싸인 젊은 시절을 부끄러워했고, 온 힘을 다해 과거를 숨기려고 했다. 그녀의 한 전기 작가가 말했듯이, "샤넬의 삶의 모든 순간은 그녀의 인생 초반부에 대한 복수였다." 많은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도운 것도 남자들에게 의존했던 이전의 삶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샤넬에게는 또 다른 치부가 있었다.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스파이였다는 혐의다. '재판받지 않은 전범'은 프랑스인들이 그녀에게 붙인 별명이다. 2014년 말, 프랑스 정부의 정보기관은 샤넬의 스파이 활동이 기록된 문서를 공개했다. 요원 번호는 F-7124, 암호명은 웨스트민스터. 문서에 의하면, 샤넬은 독일군 비밀 요원인 한스 귄터 본 딩클라게와 동거하면서 독일에 협력하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종전 후 샤넬은 1급 나치 부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00만 명 이상의 나치 협력자들을 재판에 회부했고 그중 만 명 이상을 사형시켰다. 샤넬 역시 처형의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처칠을 비롯한 유력 인사들과의 인맥 덕분에 풀려났고, 무사히 스위스로 도피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 장교들과 사귀거나 매춘 행위를 한 여성들은 삭발당하고 거리를 끌려다니며 조리돌림을 당했으나, 샤넬은 이 또한 피할 수 있었다. 그녀는 이후 10년간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최근에 공개된 프랑스 기록 보관소 문서에는 샤넬이 레지스탕스 멤버로 기재되어 있다. 그녀가 나치 부역자라는 기록과 상반되는 사실이다. 그녀의 전기 작가들 역시 독일 포로수용소에서 조카를 빼내기 위해 나치에 협력했을 것이라고 한다. 독일 첩보국에서는 샤넬을 공작원으로 정식 등록하고 이용했지만, 샤넬이 과연 자신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활동했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천재적인 패션 아이콘, 가난과 고난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한 사업가, 페미니스트들의 영웅, 나치 스파이, 심지어 레지스탕스? 샤넬의 정체성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이런 점에서 로랑생의 초상화는 샤넬의 화려한 페르소나(persona)를 보여주는 사진들보다 그녀의 실체를 더 정확히 묘사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회색의 필터를 통해 한 인간을 볼 수밖에 없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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