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일로의 한러 관계를 우려한다 [시론]

한겨레 2024. 4. 1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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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9월13일 북러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자료사진

위성락 | 전 주러시아 대사

한-러 관계가 지속적으로 악화하는 가운데 러-북 관계는 날로 긴밀해지고 있다. 한-러 관계는 수교 이래 최저점을 갱신 중이다. 한-러 간의 날 선 공방은 일상화되었다.

필자는 냉전이 끝나가던 1980년대 말, 젊은 외교관으로서 한-러 수교 업무의 주무를 맡아 보았다. 그런 연고로 추락하는 지금의 양국 관계를 보는 필자의 소회는 착잡하기 그지없다. 당시 러시아는 개혁 개방으로 탈냉전 시대를 열고 서방과 관계 개선을 하려는 나라였다. 남북한과의 관계에서도 한국을 더 중시했다. 그러나 이후 러시아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이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려 한다고 인식하여,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남북한과의 관계도 조정했다. 그러다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한국은 서방의 제재에 동참했다. 반면 북한은 하노이 미-북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래 한·미와 대결을 심화하다가, 러시아를 지지하고 연대를 표방했다. 더욱이 북한과 러시아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적대시 정책’의 피해자라는 동류의식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한국의 새 정부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하는 길에 나섰다. 역내 미국 주도의 안보연대에 극도의 경계심을 보여온 러시아는 북한과 손잡고 본격 대항하기 시작했다. 작년 러-북 정상회담을 통해서다. 무엇보다도 러-북은 군사협력을 부각시켰다. 러-북 간에 무기와 기술이 거래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거래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배치되는 데도, 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러시아는 미국이 리드하는 역내 세력연대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며, 그 대응방식에 제약은 없다는 점을 각인시키려는 듯하다. 사실 과거에 러시아는 민감 군사기술을 북한에 이전하는 데 신중했다. 그러나 미-러 대립이 극심한 지금 러시아는 미국을 자극하는 데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금처럼 러-북 협력이 지속되면, 우리 안보에 심대한 악영향을 끼친다. 첫째로 러시아의 비호 아래 북한이 핵미사일 능력을 발전시킨다. 안보리 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기능정지에서 보듯이, 러시아가 나서 안보리 제재 체제를 지속적으로 손상시키므로 북한이 제재를 회피할 여지가 커진다. 그러면 북핵 문제 해결은 더 멀어진다. 둘째로 러-북 군사협력은 북한의 재래식 전력을 향상시켜 도발 가능성을 키운다. 러-북 정상회담에서 위성 관련 협력 합의가 나온 이후, 북한은 실패를 거듭하던 정찰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러-북이 잠수함, 전투기 분야에서 협력할 가능성도 있다. 셋째, 러-북 안보협력의 차원이 격상될 수 있다. 러-북은 푸틴 대통령의 북한 방문 계기에 지금보다 격상된 안보협력 관계의 법적 기초를 공표할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러-북이 캠프 데이비드 합의보다 진화된 안보협력 합의를 내놓는다면 북한은 고무될 것이다. 넷째로 러-북 관계 강화는 중-러 연대와 맞물릴 소지가 상당하다. 결과적으로 한반도 주변에 한·미·일 대 북·중·러의 대립선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자칫하면 한국은 냉전시대처럼 서방 진영의 최전선에서 러시아, 중국과의 대결을 감당해야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의 주요 외교 과제인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추구의 길이 막힌다. 러시아와 중국이 방해하고 나오면 이 작업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절한 대처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목표는 러시아가 안보리 결의를 무시하고 북한과 군사협력을 하여 우리 안보를 저해할 가능성을 억제함으로써, 한-러 관계의 파탄을 막고 관계 복원의 길을 여는 것이다.

대처 방향과 관련하여, 한국 내에는 중국이 러-북 연대를 못마땅해 할 것이라는 전제에서, 중국을 활용하여 러-북 협력을 제어했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혼자서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중국이 러-북 밀착을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좀처럼 러시아를 견제하고 나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중국에 러시아와의 연대는 중요하고, 중국 또한 북한 관련 안보리 결의에 열의가 별로 없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중국과 분야별로 협조할 전략적 의도를 갖고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하여,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미-중 간 협조 사안으로 분리해 낸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그 때 한국은 그 상황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미-중 간의 전면적인 경쟁 대립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의 미-중 관계에서 이것이 가능할 지이다.

다음으로 한국이 나서서 러시아와 교섭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 국내에는 한국이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개선, 한·미·일 안보협력을 이뤘으니, 이제 고양된 입지에서 러시아와 대화를 하여 문제를 풀어가면 된다는 다소 태평한 순차적 대처 구상이 있다. 그러나 첨예한 미-러 대립 때문에 한-미, 한·미·일 관계 강화가 즉각 한-러 관계에 악재가 되는 환경에서, 그것도 러시아가 작심하고 대항하려는 상황에서, 단순한 순차적 대처가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비근한 예가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교 차관의 방한이었다. 루덴코 방한은 한-러가 고위급 양자대화를 통해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어렵사리 준비한 것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터진 러시아 외무성 대변인의 한국 비난 발언과 뒤이은 상호간의 치고받기로 나쁜 분위기가 조성되는 바람에 루덴코 방한은 휩쓸려 가버렸다. 이처럼 지금 한-러 양자대화를 저해할 악재는 차고 넘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사정은 우리에게 좀 더 전략적이고 조직적인 접근을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단순한 순차적 대처 대신, 처음부터 우리의 대미국, 대러 관계 전반에 대해 통합되고 조율된 전략을 세워 총체적(holistic)으로 접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된다. 그 전략 속에는 대미 공조 수위는 어느 정도이며, 대러 외교 공간은 어느 만큼인지가 담긴 한국형 좌표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러시아가 진지한 대화에 응할 가능성이 커지고, 대화가 성과를 낼 개연성도 커질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기초로 몇 가지 세부 전술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연성 전술인데, 한국이 러시아에 대한 대미공조의 수위를 약간 조정한 뒤, 거기에서 생기는 운신 여지를 갖고 러시아와 기본적인 교류를 유지하면서, 이를 지렛대로 러시아의 행보를 억제하는 방안이다. 둘째는 경성 전술인데, 러시아가 고도로 경계하는 조치까지 열어놓고 이를 카드로 활용하면서 강하게 만류하는 방안이다. 만일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 미국의 대러 정책이 크게 바뀔 것이므로, 우리가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한국에 한·미·일 공조를 하면서 북·중·러와의 관계를 관리하는 일은 당위적이면서 딜레마적인 난제이다. 이제 러시아가 북한과의 연대를 치고 나왔으므로, 우리로서는 대응을 미룰 수 없다. 그런데 이미 악화된 관계 여건 때문에, 이렇다 할 방략 없이 단순히 한-러 고위급 대화를 해서는, 러시아의 행동을 통제할 수 없고 반전의 전기를 잡기도 어려워 보인다. 무언가 새로운 접근 방법을 고려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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