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 용지 읽는 데만 5분” 시각장애인과 투표소 찾은 서울대생들

김도연 기자 2024. 4. 10.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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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학생사회공헌단 학생 7명
‘시각장애인 선거참여’ 모니터링 진행

“투표소로 지정된 학교 정문부터 투표장까지 50m 길목에 점자 블록이 끊겨 있더군요”

22대 총선 본투표가 진행된 10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국립서울농학교 대강당 앞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곽남희(32)씨가 이렇게 말했다. 서울대 학생사회공헌단 단원인 박하늘(24)·정석민(24)씨는 곽씨와 같은 시각장애인 유권자들이 어려움 없이 투표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투표소를 찾았다.

이날 서울대 학생사회공헌단 학생 7명은 시각장애인들과 서울 종로구·동대문구·관악구 등의 12개 투표소를 찾아 시각장애인의 선거 참여 여건을 모니터링하는 활동을 했다. 시각장애인들의 참정권을 증진하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됐다. 공헌단은 작년 1학기부터 세 학기째 시각장애인 배리어프리(barrier free·무장애) 관련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 이번 총선을 앞두고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함께 모니터링 활동을 추진했다.

투표를 마친 시각장애인들과 만나 고충을 듣는 설문조사도 했다. 학생들은 설문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선거관리위원회 등 유관 기관에 관련 대책이나 법령 개정을 제안할 예정이다.

10일 서울 종로구 국립서울농학교에서 투표를 마친 시각장애인 곽남희(왼쪽)씨가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재학 중인 박하늘씨의 설문조사에 응하는 모습. /서울대 학생사회공헌단

점자를 읽을 수 있는 시각장애인들은 ‘점자형 투표보조용구’를 투표용지 위에 겹쳐 올리는 방식으로 투표에 참여한다. 이 보조용구는 시각장애인의 투표를 돕는 도구다. 각 후보와 정당의 이름, 기호가 점자로 표시돼있고, 기표란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투표 용지에 바로 기표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선관위 관계자는 투표용지를 보조용구에 끼워 시각장애인에게 전달한다. 일부 시각장애인들은 이 보조 용구에 난 구멍이 도장 크기와 엇비슷해, 도장을 자칫 잘못 찍으면 어느 후보·정당에 투표했는지 흔적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한다고 한다.

곽씨가 그 사례다. 곽씨는 이날 투표를 마치고 나와 서울대생 박하늘씨와 만나 “점자로 된 투표 보조 용구를 사용했는데,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보조 용구를 사무원이 제대로 처리했는지 확인해주지 않았다”며 “도장을 찍다가 인주가 살짝 묻었다면 어느 정당을 찍었는지 남들이 알게 돼 비밀 투표가 지켜지지 않을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22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5일 서울 성동구 왕십리도선동 공공복합청사에 마련된 사전투표소를 찾은 한 시각장애인이 점자 투표지를 읽고 있다. /뉴시스

같은 날 다른 투표소에서도 모니터링 활동이 진행됐다. 이날 오전 11시 30분 서울 동대문구의 이문초등학교에서 또 다른 단원인 강민지(22)·신훈(28)씨도 시각장애인 조태현(25)씨와 함께 투표소를 살폈다. 투표를 마친 조씨가 출입구를 착각한 한 시민과 동선이 겹쳐 부딪힐 뻔하자 신씨가 “조심히 오세요”라며 조씨의 팔을 잡고 길을 안내하기도 했다.

이날 단원들과 만난 조씨는 “나는 점자를 읽지 못하는 저시력자라서 눈으로 투표용지를 읽는 게 가장 어려웠다”며 “투표소 내부에서 휴대폰 카메라를 쓰는 것이 불법인 건 알지만 확대경이 따로 없어 휴대폰으로 확대만 해보고 화면을 바로 껐다”고 털어놨다. 신훈씨가 “투표소에는 확대 렌즈가 마련되어 있는데 안내 받지 못했냐”고 묻자 조씨는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며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한 손으로는 긴 비례 투표용지를 짚어가며 읽느라 투표하는 데만 5분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10일 서울 동대문구 이문초에서 투표를 마친 시각장애인 조태현(가운데)씨가 서울대생 신훈(왼쪽)씨·강민지씨의 설문조사에 응하는 모습. /서울대 학생사회공헌단

조씨와 2시간 가량 투표소를 둘러본 단원 강민지씨는 “비장애인들도 도장을 잘못 찍어 무효표로 처리될까 노심초사하는데 시각장애인은 그런 걱정이 더 클 것 같다”며 “유권자가 먼저 장애인이라고 드러내야만 안내가 이뤄지는 상황이 아쉽다”고 말했다. 신씨는 “3시간 가까이 모니터링을 해보니 점자나 사무원의 동선 안내 등 유권자가 투표소를 찾아오는 길부터 어려운 점이 많았다”며 “관련 개선책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단원들이 다녀간 투표소에는 다른 장애인 유권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서울 종로구 국립서울농학교에는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가 보조원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투표장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부모의 어깨를 잡고 투표장을 찾아가는 시각장애인도 있었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시각장애인 이인서(20)씨는 “오늘이 인생 첫 선거였는데 점자 투표지가 잘 마련돼 있어 투표를 무사히 마쳤다”며 “앞으로도 점자가 어렵게 써있거나 잘못 점역(點譯·말이나 글자를 점자로 고치는 것)되는 일 없이 투표가 무사히 진행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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