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투표율 이끈 민심…“윤 대통령 실망” “정부 힘 실어야”
저마다 한국 정치와 사회의 변화를 염원하는 ‘귀중한 한표’였다. 장애인은 기어서 투표장까지 향했고, 섬 주민은 배를 타고 투표소로 향하다 표류하는 사고를 겪기도 했다.
새벽부터 기다려 해당 투표소 첫 번째 투표자임을 자랑하고, 귀여운 캐릭터에 투표 도장을 찍는 등 동료 시민의 투표를 독려하는 방법은 더 다양해졌다.
시민들은 날 선 공격과 막말로 점철한 22대 총선에 피로감을 호소하면서도, ‘갈등하는 국회 대신 일하는 국회’가 되어달란 바람을 표에 담았다고 입을 모았다.
“모든 정책 펼쳐놓고 비교해보고 왔다”
10일 오전 8시께부터 서울 용산구 이태원초등학교 투표소에는 10분에 2∼3명꼴로 시민들이 방문했다. 대통령실이 이전하며 새로운 ‘정치 일번지’가 된 곳이자, 2022년 대규모 참사가 발생한 선거구다. 각 후보의 선거 공보물을 옆구리에 끼고 투표하러 온 젊은 남성, 투표 안내문을 돌돌 말아 손에 꼭 쥔 백발노인 등이 투표소를 찾았다.
김도연(29)씨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태원 참사 특별법’ 거부권 행사 등을 언급하며 “정부에 불만이 있다. 탁상공론이 아닌, 행동하는 정치인들이 많아졌으면 한다”고 했다. 박신옥(90)씨는 “야당이 지도자들이 다 피의자”라며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이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뒷받침하는 국회가 돼야 한다”고 했다.
여론조사 결과가 팽팽한 서울의 여러 격전지에서도 현 정부에 대한 심판과 지원 사이에서 의견은 엇갈렸다. 서울 동작을 중앙대 부속중학교 투표소에서 만난 강아무개(61)씨는 “여당 지지자였지만 이번에 선택을 바꿨다. 윤 대통령에게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반면 서울 중성동을 광희초등학교 투표소에서 투표한 최현창(64)씨는 “여소야대 때문에 일을 잘 못 했으니, 정부 정책이 잘 실현되는 국회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기 밥그릇 아닌 서민 ‘밥그릇’ 위해 일할 사람”
정치 구도를 떠나 나와 우리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정책을 호소한 유권자도 적잖았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주민센터에서 투표한 신혼부부 정우현(33)씨와 신주은(30)씨는 “모든 정책을 펼쳐놓고 비교했다. 후보나 당의 정책이 나와, 우리 다음 세대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채아무개(63)씨는 “자기 밥그릇 싸움이 아닌, 서민들의 ‘밥그릇’을 위해 싸워줬으면 한다”며 물가나 경제 상황을 해결해 줄 국회를 기대했다.
‘인증숏’을 통한 시민들의 투표 독려는 좀 더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손등에 도장을 찍는 방식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그려진 용지에 도장을 찍은 뒤 에스엔에스(SNS)에 올리거나, 해당 투표소에서 제일 먼저 투표를 했다는 표식인 ‘제1호’ 투표확인증을 인증하는 식이다.
힘겹게 투표함에 한 표를 넣은 시민들도 있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주소지인 혜화동에서 ‘포체투지’(휠체어에서 내려 온 몸으로 기어 이동하는 것)로 투표를 마쳤다. 사전투표 기간 경찰과 선관위에 의해 포체투지 투표를 저지당한 뒤, 세 번째 시도 끝에 성공한 것이다. 투표소 안에서도 직원들과 박 대표 사이에 휠체어 탑승 여부를 두고 갈등이 벌어졌으나 박 대표는 끝내 바닥에 몸을 붙인 자세로 표를 던질 수 있었다.
박 대표는 “휠체어를 타고 안 타고는 내 선택의 문제다. 비장애인들도 저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투표소에 온다. 저는 신체구조상 간절한 마음을 기어서 투표소에 들어가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인데, 장애인에게만 ‘소란 행위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식의 차별적 인식이 힘들다”고 말했다.
경남 통영 오곡도에서 투표소가 있는 근처 학림도로 향하는 유람선을 탔던 주민 6명은 이날 오전 9시50분께 선박이 표류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오곡도에는 투표소가 없어 투표하려면 학림도 학림지구마을센터에 설치된 산양읍 제3투표소까지 배를 타고 가야 한다. 주민의 투표소 이동을 위해 동원된 유람선 스크루에 그물이 감기면서 배가 멈춰서 파도에 밀리게 된 것이다. 20분여분 뒤 통영해양경찰이 주민 6명을 모두 구조해 주민들은 무사히 투표를 마칠 수 있었다.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고나린 기자 me@hani.co.kr 김채운 기자 cwk@hani.co.kr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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