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애리조나, 160년 전 ‘임신중지 금지법’ 부활···대선 판세 영향 미칠듯
강간·근친상간 임신에도 예외 없이 ‘범죄화’
바이든 “공화당 의제 반영…잔인한 법” 비판
미국 애리조나주 대법원이 여성의 생명이 위험할 때를 제외하고 모든 경우의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160년 전 제정된 법을 부활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오는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의 주요 경합주로 꼽히는 애리조나에서 이번 판결이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며 대선 판세에 영향을 미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애리조나주 대법원은 9일(현지시간) 대법관 찬성 4, 반대 2 의견으로 “연방법이나 주법에 1864년 법령의 시행을 금지하는 조항이 없다”며 그간 사문화됐던 ‘임신중지 금지법’이 현재도 다시 시행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1864년 제정된 이 법은 임신부의 생명이 위태로운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임신중지를 범죄화하며, 강간이나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도 예외로 두지 않는다. 이 법에 따르면 임신중지 시술을 하는 의사나 이를 돕는 이들은 2~5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이전까지 애리조나에선 임신 15주까지 임신중지가 법적으로 가능했다.
임신 초기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다른 주법들이 제정되며 사문화됐던 160년 전 법을 법원이 다시 부활시킨 것이다.
2022년 미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지 권리를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고 각 주의 결정에 맡긴 것이 ‘부활’의 계기가 됐다. 이후 공화당 소속이었던 당시 애리조나주 법무장관이 주법원 판사를 설득, 1864년 주법의 집행에 대한 차단 조처를 해제하면서 이 법의 시행을 둘러싼 법정 다툼이 시작됐다.
이날 애리조나주 대법원 판결로 미국 50개주 가운데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주는 15곳으로 늘어났다.
다만 대법원은 이 법의 합헌성에 대한 추가 의견을 듣기 위해 사건을 하급심 법원으로 돌려보내며 14일간 효력을 유보했고, 법 시행까지 추가로 45일간의 유예 기간을 뒀다.
민주당 소속인 크리스 메이즈 애리조나주 법무장관은 “애리조나가 주(州)가 아니었고 남북전쟁이 격렬했으며, 여성이 투표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의 법을 다시 시행하기로 한 오늘 결정은 우리 주의 오점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 언론들은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주요 격전지 중 한 곳인 애리조나에서 이번 판결이 선거 쟁점으로 부상하며 향후 대선 판세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번 판결이 여론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며 “임신중지를 제한하기 위해 수십년간 노력해온 공화당에게 또 다른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난달 실시된 애리조나대학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 유권자의 7%만이 ‘예외 없는 전면적인 임신중지 금지’를 지지한다고 답했다.
AP통신에 따르면 2022년 중간선거 당시 조사에서 애리조나주 유권자 10명 가운데 6명이 전국적으로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보장하는 데 찬성한다고 답했다. 임신중지 자유를 지지하는 애리조나주 주민들은 오는 11월 임신중지 권리를 주헌법에 명시하기 위한 주민투표 법안을 추진하고 있다.
민주당도 이를 적극 쟁점화하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 직후 성명을 내고 “수백만명의 애리조나 주민들은 건강이 위험하거나 비극적인 강간 또는 근친상간의 경우에도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훨씬 극단적이고 위험한 임신중지 금지법 아래 살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잔인한 법은 여성이 투표권을 갖기 훨씬 이전인 1864년에 제정됐다”며 “이번 판결은 여성의 자유를 빼앗으려는 공화당 선출직 공직자들의 극단적인 의제가 반영된 결과”라고 밝혔다.
반면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전날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올린 동영상에서 임신중지 문제에 대해 “각 주가 투표나 입법에 의해 결정할 사안이며, 결정된 것은 해당 주의 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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