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무엇인가 [영화와 세상사이]
지난 2월22일 개봉한 ‘파묘’는 모처럼 극장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천만을 돌파했다는 단순 관객 수로만 잣대 삼아 영화를 바라봐선 안 된다. 영화를 감싸는 담론이 다채롭게, 또 활발하게 전개됐다는 점이 중요하다.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제각각 갈렸으며 평자들과 유튜버들은 저마다의 리뷰와 해석 영상을 올리기 바쁘다. 그렇다면 파묘는 왜 사람들을 끌어당겼나.
그 이유는 파묘가 어떤 영화인지 파악하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파묘는 단순한 미스터리 오컬트가 아니다. 미지의 영역을 내버려두지 않고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 바꾸는 영화다. 또 공포의 근원을 애써 무시하지 않고 기꺼이 그걸 해소하고 치유하려는 태도가 돋보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에 영화 속 인물들이 왜 이 여정에 몸담게 되며, 왜 각자에게 이런 역할이 부여됐는지 따져보면 영화에 깃든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 풍수사, 무당, 장의사의 여정
풍수사 상덕(최민식)은 남들이 지나칠 법한 명당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는 명당을 발견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풍수지리에 의지한다. 이제 풍수사가 정령을 처단할 때 삽입되는 보이스오버를 떠올려 본다. 이미지로 설명해도 될 순간을 과하게 말로만 풀어내는 방식처럼 느낄 수 있겠으나, 영화에 일관되게 배어 있는 논리로만 보면 타당한 귀결점이자 선택이다. 풍수사는 모두가 볼 수 있는 요소 가운데 남들은 볼 수 없는 걸 봐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봤던 것들은 그의 입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상 남들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허리가 끊겨 있는 한반도의 정기 회복을 위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정령을 처단하는 자가 돼야만 하는 여정 자체는 그에게 필연이자 운명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영화 내내 비중이 없어 보이는 장의사 영근(유해진)의 행보에 의문을 품는 관객이 있을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 역시 파묘의 서사로 보면 당연한 전개다. 장의사는 자신이 다루는 대상과 원활히 소통할 수 없다. 시체를 누구보다 잘 다루지만 시체는 소통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장의사는 결코 정령을 상대할 수 없다.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도 마찬가지다. 무당은 귀신과 영혼 따위의 존재들을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온몸의 감각을 동원해 느낀다. 하지만 정작 그것들을 개체 대 개체로 직면하는 데엔 어려움을 겪는다. 그저 누군가에 빙의된 형태로만 마주할 뿐 온전한 존재를 마주할 수는 없다. 그렇게 물리적인 실체를 느낄 새도 없이 영혼들은 육체를 들락거리고 인간을 기만한다. 이에 파묘에서 화림은 오니를 대면할 때, 자신이 모시는 신을 끌어들여 속임수를 동원해 일종의 필터를 마련한 채 상대했다.
그렇기에 오직 풍수사만이 고단한 육체를 내세워 다이묘(오니·일본 귀신·도깨비)와 개체와 개체로 맞설 수 있다. 상덕은 대면해서 판단한다. 두 가지 메커니즘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그는 일단 대면해서 자신이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들을 가려내는 작업에 돌입하려 든다. 그런 점에서 오니는 풍수사를 당황하게 만드는 존재다. 오니는 풍수사가 보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니는 제멋대로 풍수사 앞에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 우리 앞에 나타난 건 무엇인가
우리는 그 과정에서 도깨비불로 변하는 다이묘의 형태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 도깨비불은 풍수사와 무당 그리고 장의사를 포함해 관객들까지 한데 묶어주는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다이묘는 그 자체로 모습을 드러낼 때 모두를 압도하는 대상이긴 했으나 그 자태를 보기 위해선 몇 가지 제약을 극복해야만 했다. 하지만 도깨비불은 다르다. 도깨비불이 하늘로 치솟으면 모두가 넋 놓고 바라본다. 도깨비불은 누구라도 쉽게 그 등장을 알아차릴 수 있으며 누구라도 홀린 듯 쳐다보게 된다. 거대한 정령이 순식간의 꿈틀대는 화염으로 변모해 하늘을 맴돌 때 사람들은 그 불을 우두커니 바라본다. 그저 현혹된 듯, 영혼을 빼앗긴 듯 쳐다만 본다. 그렇게 활활 타는 화염을 바라보는 얼굴 클로즈업 숏이 하나씩 관객에게 제시된다.
그렇다면 그 이후 따라오는 질문. 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관객들은 그들이 불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정작 영화는 도깨비불과 관객들이 온전히 서로간 대면할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물들이 보고 느꼈던 화염과, 관객들이 가늠하고 짐작하는 화염 사이 빈틈이 생기게 된다. 이를테면 인식의 차이, 즉 같은 대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자그마한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재밌게도 이 균열을 닫아버리는 건 다름 아닌 도깨비불의 다른 형태인 다이묘 자체다. 왜냐하면 다이묘는 도깨비불과 다르게, 관객과 인물들에게 나타나는 데 있어 다른 방식으로 분열되지 않는다. 관객에게도, 인물들에게도 다이묘는 그저 다이묘다.
■ 미스터리를 해소하는 영화
이어 짚어야만 하는 질문이 또 있다. 다이묘는 왜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그건 바로 파묘가 ‘문제의 근원’을 해소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이묘가 온전히 사라지려면 모두에게 동일한 방식과 형태로 나타났다가 오롯이 소멸해야 한다. 파묘는 그 해결의 과정 전반과 그에 배어 있는 논리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그를 위해 영화 내 모든 요소가 기술적·미학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일 양국의 무속신앙을 엮어내고, 그 신앙과 문화의 충돌을 다루기 위해 첩장이라는 소재까지 동원한 파묘는 각종 설정과 다채로운 장르 요소의 외피로 둘러싸여 있다. 결국 파묘는 한반도에 꽂혀 있는, 봉인된 일본 귀신을 끄집어내 없애는 이야기다.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우리가 마주하는 공포나 미스터리를 영화가 어떻게 대하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곡성’이나 여타 오컬트 영화와 다르게 파묘는 초자연적인 존재라든가 미지의 공포를 뿜어내는 대상을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로 남겨 두지 않았다. 해소할 수 있고 씻어낼 수 있는 분명한 속성을 부여했다.
이건 파묘가 악령이나 원혼을 그려내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령의 육성이 들리고, 정령화된 오니가 인물들의 눈앞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만약 도깨비불이 사라질 수 없는 불가사의 그 자체로 주인공들을 계속 괴롭혔다면 이 영화는 미지의 공포를 다루는 코스믹호러 장르의 하위 변주에 지나지 않았을 게 뻔했다. 이 과정에서 미지의 존재를 그려내는 방식이 영화의 호불호로 이어졌다. 문제는 그 표현법이 바로 영화의 핵심이자 근간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파묘는 우리 앞에 나타난 게 무엇인지 그려내고, 붙잡아 파헤치다가 마침내 그 안에 엉킨 미지의 실타래를 완전히 풀어 해체한다. 그 과정을 버텨내야만 우리가 모두 미스터리에서 해방될 수 있기에 파묘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다.
송상호 기자 ssho@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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