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심판" vs "이조심판"···'민생' 사라지고 '정치혐오'만 남긴 총선
4.10 총선은 대한민국에 무엇을 남겼을까.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은 일찌감치 '정권심판론'을 내세웠고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으로 맞불을 놨다. 그 결과,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민생 정책 공약은 무대에서 밀려나고, 막말과 상호 비방 등 '네거티브 경쟁'이 그 자리를 채우며 '정치혐오'를 키웠다.
당초 거대 양당 정치 극복이란 깃발을 들고나온 제3지대 정당들도 소패권주의에 휩쓸려 합종연횡을 시도하다 유권자들의 마음를 얻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다.
역대 총선에서 정권심판론은 야당이 종종 들고 나오는 카드지만 올해 총선에서 민주당은 특히 공천갈등을 겪은 뒤라 지지층 결속을 염두에 두고 이 전략에 더욱 무게를 실은 것으로 풀이됐다. 민주당 측은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등 이미 악화된 민심을 당이 따라간 것"이라고 했다. 정권심판론은 '윤석열 정권 조기 종식'을 내건 조국혁신당 등장과 맞물려 더욱 힘을 받았다.
국민의힘은 '이조심판론'으로 맞섰다.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에 '이조심판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사법리스크를 파고 들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유세현장에서 "범죄 혐의자들에게 미래를 맡길 수 없지 않나. 뭉쳐야 한다"며 지지층에 표심 결집을 호소했다. 국민의힘은 지난 4년 간 국회에서 야권 주도의 일방적 법안 통과와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반복된 일을 들며 '거대야당 심판론'도 제기했다.
심판론 대결 속에 정책경쟁은 실종됐고 정치혐오만 커졌다는 평가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머니투데이 더300(the300)에 "이번 총선은 유난히 혐오정치의 양상이 두드러졌고 한국 정치의 난맥상을 그대로 드러냈다"며 "우리의 비전이 무엇이고 직면한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각 당 정책 차이는 무엇인지가 이야기된 기억은 없다. 한반도 안보, 미중 경쟁 시대의 생존전략, 청년 일자리, 저출생, 연금개혁 등 과제들을 두고 여야의 대안을 비교해 볼 기회가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박창환 장안대 특임교수는 "선거에서 야권이 심판론을 내세우면 여당은 일꾼론, 정권안정론을 내세우는데 이번엔 이례적으로 여당에서도 야당심판론이 나와 심판론 대 심판론의 구도가 형성됐다"며 "이 구도에서 국민들은 누가 더 나쁜지 저울에 달아보고 결국 차악을 선택하는 선거를 치렀다. 정책선거는 요원했다"고 말했다.
이준한 인천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번 선거는 선거의 수준, 민주주의의 수준, 후보자의 자질 등 모든 측면에서 퇴보한 선거"라며 "여야를 막론하고 공천 과정에서부터 선거는 혼탁했고 그 과정에서 공약과 정책은 없었다"고 혹평했다.
전문가들이 이번 선거를 '퇴행적'이라고까지 진단한 이유 중 하나는 이번 총선을 처음부터 끝까지를 장식한 각종 설화였다. 과거 발언 탓에 공천에서 낙마하는 경우도 있었다.
민주당 경선에서 서울 강북을 후보로 결정됐던 정봉주 전 통합민주당 의원이 막말논란으로 후보 지위가 박탈됐다. 그는 2017년 한 팟캐스트 채널에서 'DMZ(비무장지대)에 멋진 것 있지 않나. 발목지뢰. DMZ에 들어가서 경품을 내는 거야. 발목지뢰 밟는 사람들한테 목발 하나씩 주는 거야'라고 한 사실이 알려진데다 피해용사에 대한 거짓사과 논란까지 더해져 결국 공천이 취소됐다.
정 전 의원 낙마 후 이 지역에 전략공천됐던 조수진 변호사는 성범죄 가해자 변호 이력과 자신의 블로그에 이를 홍보하는 취지의 글을 올린 것이 논란이 돼 낙마했다.
국민의힘에서는 대구 중·남구 지역에 후보로 나섰던 도태우 변호사가 5·18 폄훼 발언 논란으로 공천이 취소됐다. 도 변호사는 지난 2019년 한 유튜브 채널에서 "5·18 민주화 운동에는 문제적인 부분이 있고 특히 북한의 개입 여부가 문제된다는 것이 상식"이라고 한 자신의 발언에 발목이 잡혔다.
부산 수영구에 출마했던 장예찬 전 국민의힘 청년최고위원은 10년 전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매일 밤 난교를 즐기고, 예쁘장하게 생겼으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집적대는 사람이라도 맡은 직무에서 전문성과 책임성을 보이면 프로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지 않을까"라고 적은 사실 등이 알려져 공천 취소됐다.
본선 대진표 확정 이후에도 설화는 끊이지 않았고 상대방의 주요 공격 포인트가 됐다.
경기 수원정에 출마한 김준혁 민주당 후보는 과거 한 유튜브 채널에서 김활란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이대 학생들을 미군 장교에게 성 상납시켰다고 한 주장, 자신의 저서에서 퇴계 이황 선생을 '성관계 지존'이라 한 사실 등이 알려져 여당은 물론 관계 단체들로부터 십자포화를 맞았다.
경남 양산갑에 출마한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은 유세 과정에서 "문재인(전 대통령) 죽여"라고 한 사실이 논란이 됐고 민주당은 곧장 "후보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이종훈 정치평론가는 "상대 후보들의 과거 발언을 소환·공격하는 일이 많았다"며 "이번 선거가 네거티브에 열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 발언을 색출해 이슈화시키는 방식으로 논란이 불거졌다"고 말했다.
상대의 흠을 찾아 부각시키는 데 혈안이 된 선거에서 '대파'와 '삼겹살' 같은 표피적 이슈들만 부상했다.
야당은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875원' 관련 발언을 막판까지 끌고가며 정쟁의 수단으로 삼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사전투표소에 정치적 표현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이유로 대파 반입을 제한하면서 논란은 더욱 이어졌다.
기득권 정치와 양당 독점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자 중도 지향의 제3지대 정당들이 등장했지만 총선 전 여론조사 공표 허용 마지막날까지 지지율 기준으로 고전한 것으로 나타나면서 제3지대의 시도는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실패의 원인 중 하나로는 이준석 대표가 이끄는 개혁신당과 이낙연 대표가 이끄는 새로운미래가 통합 발표 11일 만에 합당 결정을 철회한 것이 꼽혔다.
김상일 정치평론가는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은 기존 정치와 다른 정치를 기대했지만 신생 정당이 다양한 목소리를 융화시키지 못하고 그들만의 패권주의, 즉 소패권주의에 갇히는 한계를 드러내면서 국민들께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며 "이들의 실패는 앞으로 또 다른 제3지대 정당들이 나오기 더 어렵게 만들었단 점에서 안타까움이 크다"고 말했다.
김성은 기자 gttsw@mt.co.kr 안재용 기자 poong@mt.co.kr 천현정 기자 1000chyunj@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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