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 시계 3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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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 브랜드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아세요?” 종종 연락하는 시계 브랜드 담당자가 듣는 사람도 없을 텐데 목소리를 낮추며 물어보았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는데요. “매출이 너무 떨어졌더라고요. 무슨 일이 있나 싶을 만큼 .” 전화기 속 목소리는 더 작아졌다. 나는 한 번 더 솔직하게 답했다. 그 시계 브랜드 좋아하지만 딱히 놀라운 결과는 아니라고.
코비드-19 사태 이후 몇 가지 사회경제적 변수는 럭셔리 업계에 즉각 영향을 미쳤다. 금리인상, 해외여행 자유화, 경기침체 등의 요인으로 코로나 수혜 업계는 제로 코로나 피해 업계가 되었고, 럭셔리 산업도 그중 하나다. 럭셔리 산업에 속하는 럭셔리 시계 산업 중 몇몇 브랜드는 유독 시장 변화의 여파를 크게 느끼는 듯 보인다. 이유는 다 나와 있다. 금리인상과 연동되는 유동성 하락과 자금경색. 해외여행 자유화와 (세계 최고의 시계 시장 중 하나인 일본의 통화인) 엔화 약세로 인한 해외 시계 구매 증가세. 동시에 내가 꼽는 이유 중에는 그보다 조금 더 개념적이고 모호한 것도 있다. 고가 손목시계라는 상품군의 기본적인 개념 설정과 마케팅 방향 설정에 한계가 왔나 싶은 것이다.
고가 손목시계의 기본 성향은 아저씨 성향 물건이다. 아저씨 성향 물건이란 무엇이냐, 각종 스펙과 극한 상황에서의 스토리텔링으로 비싼 가격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스포츠카와 SUV다. 신형 911 출고분 중 서킷에서 엉덩이를 흘리거나 천안논산고속도로에서 남몰래 270km/h를 밟을 차가 얼마나 되겠으며, G바겐 중 정말 도강을 할 차가 얼마나 되고, BBC 모니터 스피커로 진짜 음악 모니터링을 할 남자가 얼마나 되겠나. 아저씨들은 그런 걸 산다. 그 제품의 오라가 남자들을 미치게 한다. 극한 성능, 뛰어난 스펙, 표현 가능한 스토리텔링에 아저씨들은 열광한다.
제품의 오라에 주력하는 중소형 사이즈의 럭셔리 시계 브랜드가 지금 주춤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고가 시계 브랜드는 유명인에게 기대 인지도를 높이는 단순한 홍보 마케팅을 진행했다. “A 드라마 주인공 B씨가 차고 나온 대세 시계예요, 고객님. 가격은 1500만원인데 지금 백화점 상품권 캐시백 가능합니다” 같은 식으로. 롤렉스나 오메가처럼 초유명 브랜드만 알려지던 때가 고급 시계 보급 1단계라면, 덜 유명한 고급 브랜드가 어떻게든 인지도를 높여온 게 시계 시장 2단계다. 이제 제품 자체에 집중하는 3단계 시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모두가 그 앞에서 맴도는 중이다.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에게 채운다고 2000만원짜리 시계를 2000개씩 팔 수는 없다. 아저씨들은 그렇게 시계를 사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최근 위블로의 행사가 인상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 위블로는 국제적으로 유명인 마케팅에 주력했다. 래퍼 제이 Z가 가사에 ‘위블로’를 쓰거나, F1 회장 버니 에클레스턴이 위블로를 차고 다니다 강도를 당해 얻어맞은 사진을 광고 컷으로 썼다. 그러나 2024년 3월 금호동에서 열린 전시 속 위블로는 기계식 시계라는 제품의 매력 자체에 주력헀다. 어떤 신소재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 누구와 협업해 어떻게 공예적이면서도 기계적인 양쪽 매력을 모두 구현했는지. 이제는 유명인을 모시지 않은 채 물건으로 승부하겠다는 기세가 있었다. 잘 만든 제품의 매력으로 손님을 모은다는 3단계 시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같은 3월에 론칭 행사를 연 파르미지아니는 등장 자체가 시장 성숙을 뜻하는 면이 있다. 파르미지아니는 뛰어난 시계 복원가 미셸 파르미지아니를 필두로 하는 시계 회사다. 리차드 밀처럼 눈에 띄지는 않지만 시계의 기계적 면모를 이해하거나 제품의 비례에서 아름다움을 볼 줄 안다면, 이 시계는 확실히 아름답다. 파르미지아니는 전에도 아름다웠지만 실적이 아름답지 않아서 몇 년 전 한국에 진출했다 금방 철수했다. 지금의 론칭은 시장을 파악한 다른 사업가가 새로 브랜드를 론칭하고 청담동 울프강 스테이크 근처에 매장을 연 경우다. 파르미지아니는 성공을 예상한다기보단 성공을 응원해야 하는 정도지만, 이 정도의 틈새시장 고급 시계 브랜드가 서울에 단독 매장을 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다.
한국의 아저씨 물건 시장은 점차 선진국 경향을 따라간다. 포르쉐 판매량이 늘자 덩달아 빈티지 포르쉐도 도로에 많아졌다. 규제를 피해 어떻게 통관시켰는지 가늠할 수 없는 공랭식 911이 한강대로를 달리는 걸 보며 조금씩 새로운 소비시대가 열리는 걸 느낀다. 고급 시계도 유명인 협찬, 무의미한 광고, 관성적 홍보를 벗어나 제품 자체의 매력을 자신만의 논리정연한 방식과 차분한 목소리로 전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가 생각보다 빠를지도 모른다. 한국은 늘 생각보다 빠르니까.
Editor : 박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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