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딕』 허먼 멜빌 “다시 또다른 고래와 싸워야 하는 운명, 하지만 이것이 인생”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김용출 2024. 4. 10.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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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경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1820년 11월 20일, 서경 119도의 적도 바로 남쪽인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미국 포경선 에섹스(Essex)호가 보트를 풀어 고래 떼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때 거대한 수컷 알비노 향유고래 한 마리가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본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향유고래는 권투장갑 모양의 머리를 이용한 강력한 박치기 공격을 해왔다. 한 번, 두 번. 선체에 구멍이 뚫리면서 238톤의 에섹스호는 10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일등항해사 오웬 체이스를 비롯해 에식스호 선원 21명은 배가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침몰하자 작은 보트에 의지하면서 구조를 기다려야 했다. 식량이 부족해 죽은 동료들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다행히 지나가는 배에 의해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살아 돌아온 체이스는 얼마 뒤 「포경선 에섹스호의 놀랍고도 비참한 침몰기」를 펴냈다.

작가 허먼 멜빌
⋯길이가 30m쯤 되는 커다란 향유고래 한 마리가 포경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충돌은 끔찍했다. 고래는 일등항해사가 펌프를 작동시킬 여유나 사냥 중인 두 척의 포경선을 불러들일 틈도 주지 않았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에섹스호는 천천히 침몰하기 시작했다.

당시 칠레 남부 모카섬 인근에는 ‘모카딕’이라는 거대한 흰색 알비노 향유고래가 포경선을 공격해 악명이 높았다. 길이 26미터, 몸무게 80톤에 달하는 모카딕은 포경선을 보면 도망가기에 급급한 일반 고래와 달리 오히려 배로 돌진해 뱃사람들의 작살에도 굴하지 않고 머리를 이용한 박치기나 큰 꼬리지느러미를 이용한 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1838년 모카딕이 포경선에 잡혔을 때 그의 몸에는 무려 19개의 작살이 꽂혀 있었다고 한다.

에섹스호가 침몰한 이십 년 뒤인 1841년 1월3일, 스물두 살의 청년 허먼 멜빌은 매사추세츠주 페어헤이븐에서 선원으로서 포경선 ‘애커시넷호’를 타고 태평양으로 항해했다. 이때 우연히 체이스의 글을 읽게 됐다. 그는 미 해군 수병까지 3년간 뱃사람 경험을 했다.

소설 『타이피』와 『오무』, 『레드번』 등을 발표하며 소설가가 된 멜빌은 1850년 여름부터 자신의 포경선 경험과 체이스의 아들을 만나서 얻은 정보 등을 바탕으로 필생의 역작을 쓰기로 결심했다. 공포와 외경을 일으키는 모비딕에게 다리를 잃은 복수의 화신 에이해브 선장이 선원들을 이끌고 저 멀리 태평양까지 추적을 거듭한 끝에 모비딕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 이야기를. 그는 이를 이듬해 10월 런던 리처드벤틀리출판사에서 세 권짜리 삭제판인 『고래(The Whale)』라는 이름으로, 이어서 11월 뉴욕 하퍼앤브라더스출판사에서 한 권짜리 『모비딕(Moby-Dick)』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모비딕』은 출간 당시 어렵고 낯설다는 이유로 외면당했지만 그의 사후 최고의 모험소설이자 해양소설로 재평가 받으며 현대 미국문학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어판은 1954년 로버트 딕슨의 축약본을 바탕으로 을유문화사에서 처음 번역 출판됐고, 1959년 양병탁씨의 완역판이 처음 출간됐다. 이후 출간이 이어진 가운데, 독자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김석희 작가의 완역판 『모비딕』(작가정신)이 최근 13년 만에 개역 출간됐다. 기존 완역판에서 150여개의 역주를 추가할 정도로 ‘결정판’으로 손색이 없도록 보완했고, 등장인물 소개와 작가연보 물론 역자 대담까지 추가돼 작품에 대한 다면적인 이해를 돕고 있다. 자, 김 작가의 개역판 『모비딕』 속으로⋯.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 몇 년 전 지갑은 거의 바닥이 났고 또 뭍에는 딱히 흥미를 끄는 게 없었으므로, 당분간 배를 타고 나가서 세계의 바다를 두루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43쪽)

화자인 이슈메일은 육지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거대한 고래를 직접 만나기 위해서 뉴욕 맨허튼을 떠나서 뉴베드퍼드에 도착한다. 이곳 여인숙에서 거구의 괴기한 야만인 퀴퀘그를 만난 뒤 동부 낸터컷으로 가서 함께 문제의 포경선 ‘피쿼드호’에 탑승한다.

“어쨌든 그건 모두 정해져 있고 예비된 일이야.” 일라이저라는 광인으로부터 운명에 대한 이 같은 경고를 들은 이슈메일 일행은, 추운 크리스마스 날 운명의 항해에 나선다. 출항 며칠 만에야 ‘신과 같은 남자’ 선장 에이해브를 처음 보게 되는데, 한쪽 다리를 잃은 선장은 고래뼈로 만든 의족을 하고 모비딕을 향한 복수의 일념을 불태운다.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곶을 돌고 노르웨이의 마엘스트롬을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놈을 추적하겠다. 그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곳곳에서 그놈의 흰 고래를 추적하는 것, 그놈이 검은 피를 내뿜고 지느러미를 맥없이 늘어뜨릴 때까지 추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이다⋯ 나는 놈에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흰 고래가 앞잡이든 주역이든, 나는 그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 것이다. 천벌이니 뭐나 하는 말은 하지 마라.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다. 태양이 나를 모욕할 수 있다면 나도 태양을 모욕할 수 있을 테니까.”(250~251쪽)

‘피쿼드호’의 항해 지도
심지어 태양까지도 공격할 수 있다고 하는 에이해브 선장은 무리한 항해를 말리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의 충고를 뿌리치고 모비딕을 끝까지 쫓는다. 대서양에서 인도양으로, 급기야 태평양으로. 에이해브 선장과 선원들은 끝없는 항해 끝에 마침내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모비딕과 대면하게 된다. 고래가 물에서 솟구치자, 에이해브는 외친다.

“지나간 내 생애의 거센 파도여, 저 아득한 곳에서 밀려와 내 죽음의 높은 물결을 더욱 높게 일게 하라! 모든 것을 파괴할 뿐 정복하지 않는 고래여! 나는 너에게 달려간다. 너와 끝까지 맞붙어 싸우겠다. 지옥의 한복판에서 너를 찌르고, 내 마지막 입김을 너에게 증오를 담아서 뱉어주마. 관도, 상여도 모두 같은 웅덩이에 가라앉혀라! 어떤 관도, 어떤 상여도 나에겐 소용없다. 저주받을 고래여, 나는 너에게 묶인 채 너를 추적하면서 산산이 부서지겠다. 자, 이 창을 받아라!”(760쪽)

소설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문제적이다. 우선 구약성서 「열왕기」에서 폭군으로 등장하는 ‘아합’에서 유래한 복수의 화신 에이해브 선장이 그렇다. 그에게서 일부 영웅적인 면모도 읽을 수 있겠지만, 점점 강해지는 광기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해 광기어린 인물을 비판할 때 그가 자주 비유되는 이유일 것이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끝내 에이해브 선장을 배신하지 못하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 에이해브와 정반대로 늘 유쾌한 낙관적인 이등항해사 스터브, 아메리카 토착민 추장의 아들이자 순수하고 이타적인 인물 퀴퀘그⋯. 다국적 커피전문점 스타벅스(Starbucks)의 유래가 되는 스타벅이란 인물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쓸모 있는 용기는 위험을 맞닥뜨렸을 때 그 위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188쪽)

유일한 생존자이자 화자인 이슈메일 역시 스스로 자칭할 뿐 본명을 알 수 없는 문제적 인물이다. 이슈메일은 구약성서 아브라함과 그의 종 하갈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름에서 유래한 인물로, 고래와 포경업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관찰자적 존재다. 어찌 보면 이방인처럼 취급당하는 미국 비주류를 대표하는 인물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타이틀 캐릭터인 모비 딕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서 소설의 성격과 사건, 인물 해석과 가능성은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모비딕은 에이해브와 선원들의 추격 대상이지만, 한편으론 작가의 우주론적 상상력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녹아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비로운 신의 본성을 대변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면 에이해브 선장은 신성한 권위와 질서에 도전하는 신성모독적 존재가 되고, 반대로 비이성적인 거악을 상징하는 존재로 바라본다면 에이해브는 도리어 거악에 맞서 싸우는 외로운 영웅이 될 수도 있다.

결국 소설은 선장 에이해브와 스타벅, 스터브 등의 항유고래 추적기이고, 화자 이슈메일의 고래와 포경에 대한 지적 탐색기이며, 고래 모비딕을 통해 펼쳐보이는 작가의 우주론이자 세계 존재론이다. 단순히 광기어린 선장 에이해브와 선원들의 고래 추적기로만 해석하면 안되는 이유다. 실제로 책에는 고래와 포경업에 대한 지식적 탐색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적 사유와 명상으로 가득 차 있다. 작살줄을 통해서 존재의 구속을 일깨우는 다음 대목처럼.

“인간은 누구나 작살줄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모든 인간은 목에 밧줄을 두른 채 태어났다. 하지만 인간이 조용하고 포착하기 힘들지만 늘 존재하는 삶의 위험들을 깨닫는 것은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급선회할 때뿐이다.”(403쪽)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1819년 미국 뉴욕시에서 의류와 직물을 수입하는 무역상을 하는 스코틀랜드계 아버지와 네덜란드계 어머니 사이의 8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형과 누나, 아래로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셋이 있었다. 어릴 적에는 하인이 셋 이상 상주하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뉴욕의 상점을 접고 1830년 뉴욕주 올버니의 친정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는 그곳에서 올버니아카데미에 입학했다가 수업료가 없어서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는 부채와 실의 속에 이년 뒤 세상을 떠났고, 그는 정통 칼뱅주의자였던 어머니의 영향 아래 자랐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멜빌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성서』를 비롯해 영적인 안정을 추구하기도 했다.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뉴욕 주립은행에 취업했다가 2년 만에 그만둔 뒤 형이 경영하는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농장 인부나 시골 초등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1839년엔 뉴욕항에서 리버풀행 화물선의 선실 보이로 채용돼 6주간 영국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1841년 1월 선원으로서 포경선 애커시넷호를 타면서 시작된다. 이때 그의 손에 들려진 것은 오웬스의 글이었다. 게다가 힘든 뱃사람 생활과 선장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중간에 탈출했다가 식인종으로 알려진 타이피족과 4주간 생활하기도 했고, 호주 포경선에 구조됐다가 다시 선상 반란에 휩쓸리면서 투옥됐다가 탈옥해야 했다. 1843년에는 해군 수병이 되기도 했다. 스스로 파란만장의 삶을 통해서 가능성을 연 것이다.

이듬해 해군에서 제대하고 랜싱버그의 어머니에게 돌아온 그는 ‘식인종과 살다 돌아온 사나이’로 알려지면서 자신의 경험담이 화제가 되고 한번 책으로 써보라는 권유를 받고서 집필에 착수했다. 그는 악전고투 끝에 글을 완성해 1846년 2월 런던 존머리 출판사에서 소설 『타이피』를 출간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멜빌은 이후 소설 『오무』, 『마디』, 『레드번』, 『하얀 재킷』, 『모비딕』, 『사기꾼』, 『필경사 바틀비』 등을 차례로 발표했다. 인생 후반기에는 소설에서 시로 경도됐던 그는 1891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성공한 작가가 되지 못했지만, 탄생 백주년을 맞아 극적으로 재조명받으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아직도 그의 영혼은 『모비딕』 속에서 분투하는 선원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갑자기 ‘고래가 물을 뿜는다!’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불쌍한 선원들은 화들짝 놀라 당장 또 다른 고래와 싸우러 달려가서, 진저리나는 그 일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오! 친구들이여, 이것은 정말로 사람 죽이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우리는 오랜 고생 끝에 이 세상에서 가장 덩치 큰 동물에게서 비록 적지만 매우 귀중한 경뇌유를 뽑아낸 뒤, 녹초가 되었지만 참을성 있게 몸에 묻은 오물을 씻어내고, 영혼의 임시 거처인 육신을 깨끗이 유지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자마자, ‘고래가 물을 뿜는다!’하는 외침 소리에 영혼은 용솟음치고, 우리는 또 다른 세계와 싸우러 달려가, 젊은 인생의 판에 박힌 일을 처음부터 다시 되풀이하는 것이다.”(581쪽)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작가정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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