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모습 밟혀” 안산 떠나거나…남았지만 “구설·낙인” 시달려
세월호 참사는 나라의 비극이었다. 동시에 안산의 아픔이기도 했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실종 5명 포함) 가운데 단원고가 있는 안산지역 희생자는 모두 263명(단원고 학생 250명, 교사 12명, 일반인 1명). 동네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사라졌고, 자식 잃은 부모는 길 위에 눈물을 뿌렸다. 누군가는 견디지 못해 안산을 떠났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안산에 남았다. 참사로부터 10년. 한겨레는 세월호 관련 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안산지역 세월호 희생자 가족의 현 거주지를 전수조사했다. 그리고 안산을 떠난, 혹은 안산에 남은 세월호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애기 생각에 아무것도 못 해”…끝내 떠난 가족들
“집에 돌아오면, 홍성에 가서 상추도 심고 그렇게 살자.”
단원고 2학년 6반 권순범의 엄마 최지영(60)씨는 2014년 4월 제주도 수학여행을 앞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가족과 함께 밭을 일구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꿈이었다. 하지만 4월16일, 단원고 학생들이 탄 세월호는 제주에 닿지 못했다. 아들은 최씨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는 그때부터 거리에서 살았다. 해 뜨면 광장에 나와 아이가 떠난 이유를 알려달라고 소리쳤고, 밤에는 농성장 바닥에서 아들을 떠올리며 울었다. 머리카락도 세월호 참사의 상징색인 노랑으로 물들였다. 진상을 규명해달라는 몸부림이었다.
그사이 최씨 가족은 안산 부곡동에 있던 집을 정리했다. 집 안 곳곳 아이의 흔적과 대면하기가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탓이다. 누나들은 “애기 생각나서 밥도 못 먹겠고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했다. 최씨는 안산 중앙동에 딸들의 거처를 구해줬다. 그리고 홀로 충남 홍성으로 떠났다. “수학여행 직전에 홍성에 가자고 순범이한테 말했잖아요. 애가 여기로 돌아올 것만 같아서요.”
한겨레가 세월호 관련 단체 도움을 받아 조사한 안산지역 희생자 가족의 현 거주지역을 보면, 2023년 12월 기준 희생자 가족 764명 가운데 최씨처럼 안산을 떠난 이는 224명(29.3%)이다. 거주지역은 안산 외 경기도가 122명(16%)으로 가장 많았고, 충청도가 32명(4.2%)으로 뒤를 이었다. 8명(1%)은 아예 한국을 떠났다.
이들이 안산을 떠난 이유는 아이와의 기억이 가장 컸다. 동네를 지날 때면 곳곳에서 아이 모습이 눈에 밟혔다. 단원고 근처에는 발을 들이기조차 어려웠다. 최씨는 “화랑유원지는 아이들이 인라인도 타고 자전거도 탔던 곳인데, 갈 때마다 그게 다 눈에 밟히고 보인다. 안산에 있으면 하나하나 다 생각나니까 떠난 것 같다”고 했다.
2학년 7반 이민우의 아빠 이종철(56)씨는 제주도에 산다. 그는 “아이와 살던 집에 계속 사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주변에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는데, 아픔과 그리움의 강도는 갈수록 높아졌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제주에 정착한 건 2015년 10월이다. 참사 직후부터 지켜온 광화문 농성장을 2015년 8월에 떠나 화성 국화도, 보령 외연도, 군산, 전주, 남해, 여수를 거쳤다. 그러다가 민우가 끝내 닿지 못했던 제주에 자리를 잡았다. 직선거리로만 약 621㎞에 달하는 여정이었다. 이씨는 “너무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조용한 곳만 찾아다녔다”고 했다.
남은 가족들은 고립…“유가족 공격 멈춰야”
안산에 남은 가족들은 정부와 언론에 의해 고립됐다. 참사 초기에는 지역사회가 함께 애도하고 아파하는 분위기였지만, 유가족을 향한 공격이 거세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정부와 언론의 공격은 가족들의 집 앞까지 따라왔다. 함께 아파하던 이웃들이 보상금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고, 유가족이 무엇을 먹고 어떤 표정을 짓는지 감시했다.
“한번은 합동분향소 앞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 이웃집이 유가족인데 맨날 뭘 시켜 먹더라. 나는 애 군대 보내고 일주일 동안 밥도 못 먹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면서도 뭐라고 반박도 못 하고 그저 뒤에서 따라가며 눈물만 흘렸습니다.” 안산에 남은 2학년 6반 신호성의 엄마 정부자(56)씨의 말이다.
정씨 가족들은 이웃을 피해 다녔다. 정씨는 “길을 가다 먼발치에서 아는 사람이 보이면 ‘여보세요’ 하면서 전화하는 척을 하고, 행여나 말을 붙일까 봐 못 본 척을 했다”고 말했다. “한번은 (고잔동에 있는) 명성교회에서 시간을 주셔서 앞에 나가서 이야기하는데 옆집 아주머니와 1층 할머니 얼굴을 보는 순간 준비했던 발표도 못 하고 차렷 자세로 엉엉 울면서 ‘여기서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이곳에 못 살게 한 것도 아닌데.”
소문과 낙인은 일터까지 따라붙었다. 안산에 남은 2학년 6반 이태민의 엄마 문연옥(51)씨는 “참사 당시 미용실을 했고 동네 사람들을 다 알고 지냈는데, 도저히 다시 할 수가 없다”며 “나는 아이를 잃은 것밖에 없는데, 죄를 지은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했다. 문씨는 “세월호 가족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돈을 얼마 받았다느니 이런저런 얘기가 나와서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
참사 이후 10년. 우리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세월호 가족들은 “상황은 더 나빠졌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더 걱정했다. 자신들은 단원고를 매개로 뭉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태원 유가족은 사회적 고립이 더 심각하지 않겠느냐는 우려였다. 안산에 남아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에서 일하는 2학년 1반 김민지의 아빠 김내근(53)씨는 “이태원 참사를 보면 정부의 대응 방식이 우리 때보다 더 나빠진 것 같다”며 “(유가족에게)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고 공격하는 이런 것들을 제발 멈췄으면 좋겠다”고 했다.
지역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안산을 생명과 안전의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생명과 안전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을 높이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이를 통해 안산이 광주나 제주처럼 역사적·정치적 상징성을 가질 때 가족은 물론 지역의 아픔도 치유·승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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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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