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이냐, ‘원 히트 원더’냐…우승 트로피 들어 올렸던 신임 감독들

최창환 2024. 4. 1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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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김주성은 양동근과 더불어 KBL 역대 최고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화려한 선수 시절을 보냈다. 지도자로는 아직 검증된 게 많지 않은 초보였지만, 김주성 감독은 정식 사령탑 부임 후 첫 시즌도 화려하게 장식하며 또 다른 명장의 탄생 가능성을 보여줬다. 물론 아직 안주할 시기는 아니다. 부임 첫 시즌에 정규리그 또는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안긴 것을 시작으로 명장의 길을 밟은 감독들도 있었지만, ‘원 히트 원더’에 그친 이들도 종종 있었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4월호에 게재됐음을 알립니다.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과 함께 한 우승
김주성 감독의 사령탑 데뷔 경기는 올 시즌이 아닌 2022-2023시즌이었다. 성적 부진을 이유로 물러난 이상범 감독의 뒤를 이어 시즌 막판 25경기를 감독대행으로 이끌었다. 김주성 감독은 높이를 살리며 원주 DB에 안정감을 심어주는 듯했지만, 말콤 토마스 영입이 실패에 그쳐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비록 봄 농구에 오르지 못했지만 DB는 김주성 감독이 25경기(11승 14패)에서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판단했다. 또한 팀을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데다 지도자 연수-코치 등 감독이 되기 위한 코스를 착실히 밟고 있었던 만큼, 2023년에 정식 감독 계약을 맺었다. 김주성 감독은 정식 감독 첫 시즌의 정규리그를 완벽히 치르며 구단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처럼 어수선한 상황에서 감독대행을 맡았지만, 가능성을 보여줘 정식 감독으로 승격된 첫 시즌에 우승을 안긴 사례부터 소개하려 한다. 최초는 대구 동양을 이끌었던 김진 감독이다. 1995년 은퇴 후 UCLA 유학을 계획 중이던 김진 감독은 박광호 감독이 동양 초대 감독으로 부임해 공석이 된 상무 감독을 맡으며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1년 만에 동양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박광호 감독에 이어 최명룡 감독까지 보좌했다.

2000-2001시즌, 동양은 3승 20패의 부진에 빠진 최명룡 감독이 물러나며 김진 감독에게 감독대행을 맡겼다. 감독대행 시절 김진 감독의 성적은 6승 16패. “성적 부진으로 감독이 물러난 자리를 물려받으면 부담감이 굉장히 크다. 시즌 중반이다 보니 감독이 할 수 있는 부분도 많지 않았다. 전술보단 심리적인 부분을 강조했다. 선수들이 자신감을 회복하고,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게 우선이었다.” 김진 감독의 회고다.

시즌 종료 후 정식 감독으로 임명된 김진 감독에겐 하늘이 내려준 두 가지 선물이 있었다. 최명룡 감독이 물러나기 직전 열린 2001 신인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지명한 김승현, 오프시즌 개최된 2001 외국선수 드래프트 전체 1순위 마르커스 힉스였다.

이들은 ‘KBL판 쇼타임’의 진수를 선보이며 만년 하위 팀 동양을 단숨에 승리에 익숙한 팀으로 만들었다. 동양은 2001-2002시즌에 정규리그에 이어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차지했고, 김진 감독은 신임 감독 최초로 정규리그,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달성한 사례가 됐다.

김진 감독은 “(김)승현이는 동국대 경기를 자주 보러 갔는데 ‘가능성 있는 선수’라는 생각은 했다. 외국선수들과 함께 하면 상황이 달라질 거란 기대는 했지만, 3순위로 선발한 건 천운이었다”라고 돌아봤다.

김진 감독에 이어 타이틀을 거머쥔 감독대행 출신 신임 감독은 DB의 전신 TG(잦은 팀명 변경에 대한 혼동이 따를 수 있으니 TG로 통일했다)에서 나왔다. 현재는 KCC 지휘봉을 잡고 있는 전창진 감독의 감독 데뷔 시절 얘기다. 고려대를 거쳐 삼성전자에 입단했던 전창진 감독은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실업농구 시절 유망주로 각광받았지만, 고질적인 발목부상으로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다.

이후 삼성전자 매니저, KBL 출범 후 삼성 운영팀장 등 지도자가 되기 전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전창진 감독은 삼성 코치를 거쳐 1999년 TG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최종규, 김동욱 감독의 뒤를 이어 2001-2002시즌 감독대행을 맡은 전창진 감독은 11승 19패를 기록했고, 시즌 종료 후 정식 감독이 됐다.

김진 감독에게 김승현이 있었다면, 전창진 감독에겐 2002 드래프트 1순위 김주성이 있었다. ‘농구대통령’ 허재도 플레잉코치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던 시기였다. TG는 2002-2003시즌 정규리그를 3위로 마친 후 6강-4강을 거쳐 디펜딩 챔피언 동양과의 챔피언결정전에서 4승 2패, 첫 우승을 차지했다. 4강에 직행하지 못했지만 우승한 최초의 사례였다.

전창진 감독은 KT 감독 시절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주무(매니저) 출신 주제에 좋은 선수 만나 우승했다’라는 비아냥 때문에 괴로웠지만, 나도 선수들도 의욕이 대단했다. 다른 팀들에 비하면 연간 예산이 절반 수준이었고, 팀도 우승 못하면 해체한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 죽을 각오로 뛰었던 시기였다”라고 회상했다.

선수로 못 이룬 꿈, 감독이 되어
선수로 뛴 팀에서 감독이 되고, 챔피언결정전 우승까지 이끈다!? 올 시즌 김주성 감독에게 남은 최종 목표다. 이를 현실로 만든 사례들이 있었다. 신임 감독으로 치른 시즌에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긴 이는 전희철 SK 감독이다. 전희철 감독은 SK에서 은퇴했고, 2군 감독-코치-사무국을 거친 후 10년 동안 수석코치를 맡으며 내공을 쌓았다.

이어 정식 감독으로 부임한 2021-2022시즌에 팀 역사상 최초의 통합우승을 안겼다. 40승은 신임 감독 최다승이었다. 오랜 코치 경력이 있었지만, 전희철 감독은 앞서 언급한 사례들과 달리 감독대행 코스는 거치지 않았다. 전희철 감독은 감독대행 경력 없는 신임 감독으로는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거머쥔 감독이었다.

선수로 뛴 팀에서 우승을 경험한 최초의 인물은 이상범 전 DB 감독이다. 다만, 지도자가 된 후 인고의 세월을 거친 끝에 따낸 열매였다. 이상범 감독은 KBL 공식 개막전에서 역대 최초의 득점이자 3점슛을 성공한 선수였다. 당시 소속팀은 안양 정관장의 전신 SBS였다.

실업 시절 포함 SBS에서만 선수로 뛰었던 이상범 감독은 은퇴 후 SBS, 정관장 코치를 거쳐 2008년 감독대행을 맡았다. 2007-2008시즌에 런&건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유도훈 감독이 시즌 개막을 약 한 달 남겨둔 시점서 갑작스럽게 물러나며 지휘봉을 잡았다.

이상범 감독은 캘빈 워너의 대마초 이슈 등 악재 속에도 팀을 29승 25패로 이끌었지만, 플레이오프에 오르진 못했다. 앞서 언급한 신임 감독 또는 감독대행들에 비하면 좋은 점수를 내릴 수 없는 데뷔 시즌이었던 셈이다.

이상범 감독의 감독 커리어가 꽃을 피우기까진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정관장은 2008-2009시즌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후 리빌딩을 선언했고, 2011-2012시즌 전까지 꾸준히 유망주를 수집했다. 2년 동안의 드래프트를 통해 선발한 선수가 박찬희, 이정현, 오세근이었다.

정관장은 양희종(상무), 김태술(사회복무요원)까지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2011-2012시즌 정규리그 2위에 이어 챔피언결정전에서 ‘난공불락’ DB를 제압,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상범 감독은 선수 시절 못다 이룬 우승이라는 꿈을 감독이 되어 이룬 셈이었다.

문경은 감독 역시 감독대행으로 온전히 한 시즌을 치른 후 정식 감독이 된 사례다. SK에서 말년을 보낸 문경은 감독은 2010년 은퇴했고, 2군 코치로 한 시즌을 경험한 후인 2011년 신선우 감독의 뒤를 잇는 감독대행으로 임명됐다.

1군 코치 경험이 없었던 데다 코치 연봉으로 계약을 맺은 문경은 감독의 감독대행 시절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승 35패 9위였지만, SK는 시즌 종료 후 문경은 감독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했다. 알렉산더 존슨의 부상 이전까지 6강 경쟁을 이어갔다는 점, 신인 김선형의 성공적이었던 데뷔 시즌 등이 하위권이었음에도 감독 계약을 맺은 요인이었다.

문경은 감독과 SK는 한 시즌 만에 환골탈태했다. 애런 헤인즈를 선발하며 중심을 잡았고, 포워드 전력을 강화하며 준비한 드롭존과 속공을 무기 삼아 2012-2013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SK가 당시 거둔 44승은 2011-2012시즌 DB와 더불어 정규리그 최다승으로 남아있다. 문경은 감독은 이후 4시즌 동안 타이틀을 추가하지 못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계약 만료를 앞둔 2017-2018시즌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안기며 재계약에 성공했다.

소리 없이 강했지만, 소리 없이 사라진 레전드
문경은, 전희철 감독은 현역 시절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였다. 나란히 2002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하지만 SK의 프랜차이즈 스타는 아니었다. 전성기를 지나 말년을 SK에서 지냈다. 각각 삼성과 동양에서 통합우승을 경험했지만, 선수로는 SK에서 우승을 이루지 못했다.

이상범 감독은 원클럽맨이지만, 리그 판도를 좌우할 정도의 스타는 아니었다. 김주성 감독처럼 원클럽맨이자 슈퍼스타로 감독까지 맡아 우승을 경험한 사례로는 추승균 전 KCC 감독이 보다 적절한 비유일 것이다. 추승균 감독은 이상민과 함께 KCC에 영구결번된 스타 출신이다.

1997년 전신 대전 현대에 입단, 2012년 은퇴할 때까지 KCC에서만 뛰었다. 데뷔 초기에는 이상민과 조성원에 가려져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베스트5와 수비5걸에 모두 선정된 경험이 있을 정도로 뛰어난 공수 밸런스를 지닌 선수였다. 화려하진 않지만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내 별명도 ‘소리 없이 강한 남자’였다. 2008-2009시즌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며 플레이오프 MVP로 선정돼 마침내 1인자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한 팀에서 통산 1만 득점을 달성한 역대 최초의 선수 역시 추승균이었다.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십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아 은퇴할 때 이미 ‘차기 감독’으로 꼽혔던 추승균 감독은 2014-2015시즌 막판 성적 부진을 이유로 자진사퇴한 허재 감독의 뒤를 물려받아 감독대행이 됐다. 남은 9경기에서 단 1승에 그쳤지만, KCC는 추승균 감독이 선수와 코치로 보여줬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해 정식 감독을 맡겼다.

추승균 감독이 정식 부임한 첫 시즌, KCC는 마침내 부활했다. 5라운드 막바지만 해도 5위였지만, 이후 12연승을 질주해 극적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선수로 뛰었던 팀에서 정규리그,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차지한 후 감독이 되어 정규리그 우승도 경험한 역대 최초의 사례였다.

비록 포워드 농구의 진수를 보여준 고양 오리온에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넘겨줬지만, 팀을 4시즌 만에 플레이오프로 이끈 데다 챔피언결정전까지 경험했다는 점에서 추승균 감독에겐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감독 데뷔 시즌이었다. 플레이오프 MVP, 감독상 수상 경력을 모두 지닌 이는 강동희 전 DB 감독, 추승균 감독 단 2명에 불과하다.

추승균 감독은 “정식 감독이 됐을 때 KCC는 화려한, 소위 말하는 이름값 높은 선수가 많았지만 전성기는 아니었다. 팀도 오랫동안 하위권에 머물렀기 때문에 6강이 첫 번째 목표였다. ‘국내선수에 외국선수를 맞춰야 할까? 외국선수에 국내선수를 맞춰야 할까?’라는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내 눈에는 국내선수 중 꾸준히 10점 이상 올릴 선수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단신 외국선수로 에밋을 선발했다. ‘에밋 고’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정규리그 우승은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우승 후보라는 평가도 못 들으며 맞은 시즌이었다”라고 돌아봤다.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추승균 감독은 감독 2년 차였던 2016-2017시즌 17승 37패 최하위에 그쳤다. 하승진(2경기)과 전태풍(5경기)이 부상으로 일찌감치 시즌아웃됐고, 안드레 에밋마저 25경기 출전에 그쳐 감독 데뷔 시즌의 영광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FA 이정현을 영입한 2017-2018시즌은 3위로 마친 데 이어 4강에 올랐지만, 챔피언결정전 무대를 밟진 못했다.

‘농구에 진심’인 KCC는 2018-2019시즌에도 대대적인 투자에 나서며 우승 후보로 꼽혔지만, 시즌 초반 14경기에서 6승 8패 7위에 그쳤다. 결국 KCC는 팀에서 이상민 이상으로 상징하는 바가 컸던 추승균 감독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별명대로 소리 없이 떠났다.

현역 커리어부터 감독대행, 그리고 감독 데뷔 시즌까지만 놓고 보면 김주성 감독은 추승균 감독과 비슷한 커리어를 쌓았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지만, 실패한다 해도 이후에 찾아올 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도 이제 막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 김주성 감독에겐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선수 시절 10여 년 동안 함께 해왔던 팬들의 기대감이라는 건 굉장하다. 김주성 감독은 현역 시절에도 워낙 잘한 스타였다. 나도 한 팀에서만 오래 뛰었고, 당시 연고지였던 전주 팬들의 팬심도 대단했다. 선수로, 감독으로 치르는 챔피언결정전은 또 다르다. 나는 우승 경험이 많아서 자신 있었지만 감독이 되어 이끈 선수들은 저마다 경험도, 생각도 달랐다. 원주 역시 팬심이 높은 도시이기 때문에 김주성 감독 역시 부담이 없진 않겠지만, 부담감을 내려놓고 첫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면 한다.” 추승균 감독의 말이다.

추승균 감독은 또한 “첫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난 오리온은 포워드 전력이 워낙 높았다. 그래서 변화를 줘야 하는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사실 플레이오프에서 급격한 변화를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준비 과정이 더 탄탄해야 한다. 나로서도 짧았지만 좋은 경험이었고, 그래서 지금은 반성도 많이 하며 해설위원으로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김주성 감독 역시 코치들과 잘 준비해 큰 틀에서 플레이오프를 치렀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 코스를 먼저 밟았던 선배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박상혁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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