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기록이 정확한 역사”… 미술계 자료수집 ‘산증인’ [나의 삶 나의 길]
어릴 적부터 담뱃갑·우표 등 모으다
잡지 속 서양 명화 보이는대로 수집
고3 땐 10권짜리 서양미술전집 완성
한국 근대미술전 관람 후 방향 전환
작가 관련 자료 없다는 사실에 주목
막노동 하면서까지 자료 수집 매진
국립현대미술관서 15년간 일하면서
자료 축적·전산화 작업 중요성 절감
국가기관보다 앞서 ‘정보센터’ 개관
미술현장 누비며 온·오프 자료 공유
“언제까지 일할 거예요” 아내 물음에
“죽어야 끝나겠지요” 허심탄회 고백
“밤하늘의 무수한 별 중에서 왜 일등별만 기억해야 하나요. 이등별, 삼등별에 대한 자료도 남겨야 우리 미술계가 풍부해집니다.”
보라색 정장 차림에 꽃무늬 또는 빨간 넥타이를 매고 각종 미술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노신사. ‘호모 아키비스트’ ‘움직이는 미술자료실’ ‘미술계 114’ ‘미술계 넝마주이 전설’ ‘미답의 길을 걸은 아키비스트’…. 수많은 별칭이 따라다니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장,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편집인, 김달진미술연구소장 등의 직함을 가진 김달진(69) 관장의 말이다.
고교 3학년이 된 1972년 봄에는 스스로 10권짜리 ‘서양미술전집’을 완성해냈다. 이영환의 책 ‘서양미술사’(1965)를 참고해 사조별로 서양 명화를 스크랩한 것인데, 김달진은 이 책보다 훨씬 많은 도판을 수집했다. 사진으로나마 웬만한 서양 박물관이 소장한 작품보다 더 많은 작품을 간직하게 된 것이다. 내적 자신감이 충만했다. 자신이 만든 것보다 나은 명화집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달 뒤 그해 여름, 김달진은 ‘한국 근대미술 60년전’을 관람하게 된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은 알았지만 우리 근대에도 훌륭한 작가가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역할에 눈을 뜨게 된다. 작가 관련 자료가 없다는 사실의 발견은 무척 중요했다. 미술자료 수집가의 활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히고야 만다. 이를 계기로 서양 미술에서 한국 미술로 수집의 방향을 전환한다.
당시 미술자료 수집은 폐지를 줍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미술을 하면 굶어 죽는다던 시절이었다. 첫 직장인 삼화교통공사에서 그의 업무는 승객 수와 학생 할인 수를 점검하고, 버스 차장들의 ‘삥땅’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화물차에 기름을 공급하던 한진화물 포항지점이나 켄터키하우스에서 닭을 튀기는 일도 미술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수집은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래 지속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20대는 막노동 하면서도 미술자료 모으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고달픈 시절이었다.
고졸 학력이었지만 수집 실적을 인정받아 1978년부터 3년간 일한 미술 전문지 ‘전시계’에서는 미술자료를 분석하는 관점을 갖추게 됐다. 자신의 이름을 건 연재물도 게재했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철퇴로 직장을 잃고 만다.
김달진은 결국 국가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보다 몇 년 빠른 2008년에 미술자료정보센터 역할을 하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했다. 앞서 2001년 12월 김달진미술연구소를 출범시켰는데, 이는 월간 ‘서울아트가이드’, 미술정보포털 ‘달진닷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한국미술정보센터’의 모태가 됐다.
‘서울아트가이드’는 가장 대표적인 정보지다. 예술의전당, 제주도립미술관 등 전국 550여곳에서 무료로 배포한다. 대부분의 갤러리가 입구에 비치하고 있다.
“전국 전시 공간의 구역별 지도와 전시 일정, 연락처, 전문가 칼럼, 작가 추천, 미술계 현안에 대한 제언 등을 싣고 있습니다.”
오래전 잊힌 작가의 부고도 챙겨 기록한다. 그에게 작가는 유·무명을 떠나 누구든 소중하기 때문이다.
2014년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자리 잡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다. 지하층은 수장고, 1층은 전시장, 2층은 미술정보센터와 관장실, 3층은 ‘서울아트가이드’ 편집실과 학예실로 쓴다. 국공립·사립 미술관 등에서 각종 기획전을 개최할 때, 이제는 이곳의 실물 자료를 대여해 가곤 한다.
그가 유독 아끼고 직접 챙기는 것은 관장실 안 3개 벽면을 가득 채운 ‘D폴더’다. 백남준, 김환기 등 대표 작가 335명을 다룬 신문, 잡지 기사와 특이 자료를 담은 스크랩북이다. 1850년대생부터 1970년대생 작가까지 시기별로 선별했다. D폴더는 날마다 새로운 자료로 채워진다. 현재 백남준의 스크랩북은 14권, 이중섭과 김환기는 각각 10권, 천경자 9권 등이다. 1974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천경자의 ‘아프리카 풍물화전’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작은 성냥갑이 눈길을 끈다.
거짓말을 못 하는 그가 즉답했다. “내가 죽어야 끝나겠지요.”
바람직한 수집품은 널리 공유하는 과정에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만큼 문화는 풍성해진다. 김달진에게 수집은 처음부터 사유를 위한 수집이 아니라 공유의 성격이 짙었다. 그는 여전히 미술 현장을 누비고, 온·오프라인으로 자료를 공유하면서 현재진행형의 삶을 펼쳐 나가고 있다. 지난 3일엔 ‘미술아카이브의 새로운 가치 창조: 수집에서 공유로’라는 주제를 내걸고 리움미술관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의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 김달진의 좌우명이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처럼 결혼·출산 NO”…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서 주목받는 ‘4B 운동’
- “그만하십시오, 딸과 3살 차이밖에 안납니다”…공군서 또 성폭력 의혹
- “효림아, 집 줄테니까 힘들면 이혼해”…김수미 며느리 사랑 ‘먹먹’
- “내 성별은 이제 여자” 女 탈의실도 맘대로 이용… 괜찮을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단독] “초등생들도 이용하는 女탈의실, 성인男들 버젓이”… 난리난 용산초 수영장
- ‘女스태프 성폭행’ 강지환, 항소심 판결 뒤집혔다…“前소속사에 35억 지급하라”
- “송지은이 간병인이냐”…박위 동생 “형수가 ○○해줬다” 축사에 갑론을박
- “홍기야, 제발 가만 있어”…성매매 의혹 최민환 옹호에 팬들 ‘원성’
- 사랑 나눈 후 바로 이불 빨래…여친 결벽증 때문에 고민이라는 남성의 사연
- "오피스 남편이 어때서"…男동료와 술·영화 즐긴 아내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