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색언론 도입자'가 '퓰리처상 제정자' 된 사연은 [역사&오늘]

김정한 기자 2024. 4. 1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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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7년 4월 10일, 미국의 언론인 조셉 퓰리처가 출생했다.

오늘날 미국 저널리즘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제정한 주인공이자, '황색 저널리즘'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허스트가 끝내 황색 언론인에 머문 반면, 퓰리처는 점차 선정주의를 멀리하고 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퓰리처는 1911년 사망 시 속죄의 의미로 유언을 통해 콜롬비아대학에 건전한 언론인 양성을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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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0일, 미국의 '신문왕' 퓰리처 출생
조셉 퓰리처(왼쪽)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경쟁을 풍자한 삽화(출처: Leon Barritt, 삽화(1898),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47년 4월 10일, 미국의 언론인 조셉 퓰리처가 출생했다. 오늘날 미국 저널리즘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제정한 주인공이자, '황색 저널리즘'을 처음 도입한 인물이기도 하다.

퓰리처는 헝가리 태생으로, 17세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1883년 '뉴욕 월드'를 인수해 수년 만에 미국 내 발행 부수 1위의 신문으로 키웠다. 1895년 그에게 도전자가 나타났다. '모닝 저널'의 발행자이자 재벌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다. 두 사람은 치열하게 경쟁했다.

퓰리처는 '재미있는 신문'을 표방하며 선정적 기사로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전략을 도입했다. 허스트는 '행동 언론'을 주창하며 고의로 뉴스거리를 만들어 기사화했다. 또한, 거대한 자본으로 퓰리처의 직원들을 스카우트해갔다.

두 신문사의 경쟁은 퓰리처의 '뉴욕 월드'가 연재하던 만화의 캐릭터 '옐로 키드'로 인해 극에 달했다. 허스트는 이 만화의 작가를 빼갔다. 하지만 특허권을 확보한 '뉴욕 월드'는 다른 작가를 섭외해 연재를 계속했다. 결국 같은 만화 캐릭터가 두 신문에 모두 실리는 해프닝이 연출됐다. 그러자 허스트는 이 작가마저 데려갔다. 이는 '옐로 키드 전쟁'이라고 불렸고, 용어 '황색 저널리즘'의 유래가 됐다.

허스트의 '모닝 저널'은 뉴욕 진출 2년도 안 되어 발행 부수에서 퓰리처의 '뉴욕 월드'를 눌렀다. 하지만 허스트가 끝내 황색 언론인에 머문 반면, 퓰리처는 점차 선정주의를 멀리하고 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자기 이름이 '황색 저널리즘'의 대명사가 된 일에 큰 자괴감을 느꼈다.

퓰리처는 1911년 사망 시 속죄의 의미로 유언을 통해 콜롬비아대학에 건전한 언론인 양성을 의뢰했다. 또한, 유산 25만 달러를 기금으로 맡겨 언론(4), 문학(4), 교육(1) 등 9개 부문에서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는 상을 만들게 했다. 이것이 바로 1917년에 제정된 퓰리처상이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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