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가 왜 없었겠나… 번역은 덤불 헤치는 막막하고 고된 걸음”
향유고래를 추적하는 대서사시
창의적·문학적으로 ‘혼’ 담아내
40여년간 해외문학을 한국어로
‘장미밭서 춤추기’와 같은 작업
“실수가 왜 없었겠는가. 잘못 이해한 곳도, 어설프게 번역한 곳도 많았다.”
완벽은 달성하는 게 아니라 추구하는 것이라서일까. 거장은 실수를 인정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출간 13주년을 맞아 개역판이 나온 허먼 멜빌(1819~1891)의 장편소설 ‘모비 딕’을 한국어로 옮긴 김석희(72) 번역가의 말이다. 제주에 머무는 그를 최근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처음엔 출판사와의 약속 때문에 ‘억지로’ 진행한 면이 있었다. 길도 없는 덤불을 헤쳐 나가는 듯한 막막하고 고된 걸음의 연속이었다. 내가 가진 문학적 소질을 쏟아부은, 내 혼을 담은 작업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선장 에이해브가 향유고래 모비 딕을 추적하는 대서사시. 한국에서 ‘모비 딕’ 번역본은 크게 둘로 나뉜다. 2010년 작가정신에서 나온 김석희 번역과 문학동네가 멜빌 탄생 200주년을 맞아 2019년 황유원 시인의 번역으로 내놓은 버전이다. 어느 것을 우위에 놓긴 어렵다. 다만 김석희의 번역은 ‘모비 딕’의 완역을 국내에 소개하는 시초가 됐다는 점에서 연구사(史)적 의미가 있다.
“문득 ‘나는 과연 이 책을 제대로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텍스트에 갇힌 채 허덕이느라 읽는 즐거움도 잘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았다. 지난해 봄 다시 책을 펼쳐 든 계기다.”
작품 제1장 두 번째 단락의 첫 번째 문장. 원문엔 이렇게 돼 있다. “There now is your insular city of the Manhattoes ….” 처음엔 이걸 ‘여기 맨해튼섬에 세워진 그대들의 도시’라고 옮겼다. 개역판에선 ‘만하토족이 살았던 섬, 이제 당신들의 도시’로 바꿨다. 그는 “원주민을 내쫓고 땅을 빼앗은 백인의 만행에 대한 작가의 반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Call me Ishmael’이라는 문장을 직역하면 뻔하다.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 달라’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창의적인 번역이라고 할 수 없잖은가. 그래도 한때 소설을 썼던 사람이라 ‘문학적으로’ 번역하고 싶었다. 궁리를 거듭한 끝에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는 문장을 얻어냈다.”
비장미가 느껴지는 ‘모비 딕’의 첫 문장. 번역가도 골머리를 앓았다. 주인공의 이름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이스마엘’에서 왔다. 유대민족의 시조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하녀의 몸에서 태어난 서자. 친자가 태어난 뒤 추방돼 팔레스타인의 사막을 방랑하는 인물이다. 김석희는 “이 ‘방랑자’는 방랑벽을 타고난 멜빌 자신의 운명을 녹여 낸 인물이기도 하다”고 짚었다.
그는 아쉬움이 남는 인물로 선원 벌킹턴을 꼽았다. 그는 이렇게 묘사된다. “키는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어깨는 딱 바라졌고, 가슴은 댐 같았다. 온몸이 그렇게 억센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는 남자를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멋진 인물임에도 뚜렷한 존재감이 없다. 김석희는 이것을 동성애적 코드와 연관 지었다. 그는 “망망대해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동성애는 얼마든지 가능한, 그러나 당시로서는 드러내기 힘든 현실이었을 테니 그렇게 그림자처럼 암시하는 것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처음 대가를 받고 작품을 번역한 것이 1982년. 이후 40년 넘도록 영어·프랑스어·일본어를 넘나들며 해외 문학을 한국어로 옮겼다. 1988년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소설가로 뜻을 펼치고자 했으나, 어째 번역으로 일이 풀렸다.
“예전에 번역을 ‘장미밭에서 춤추기’라고 비유한 적 있다. 한계가 뚜렷한 가시밭이지만 나름대로 글쓰기를 할 수 있으니 ‘고통 속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소설가로 서고자 했으나 그러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 글쓰기의 욕망이 들어앉아 느낀 갈증과 허기를 이 책을 번역하면서 달랬다.”
오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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