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대한민국의 탄성과 소성
필자의 직업은 연구자이고 전공은 건축재료이다. 건축재료는 화학과 분자 단위까지 탐구하는 재료공학에 비하면 연구 범위는 좁은 편이다. 물론 필자의 판단이 우리 전공 연구자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분야는 관계를 더 생각한다. 삶, 삶을 담는 디자인, 그리고 물리적 환경의 실현을 서로 연결하는 관계다.
건축 분야에서는 건축가를 제네럴리스트라 하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하는 반면, 우리 전공의 전문가를 스페셜리스트라 하고 악기 연주자에 비유한다. 재료공학 분야에서 보면 관계에 좀 더 중점을 두는 건축재료 분야가 제네럴리스트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것이 상대성이다. 상대성이론의 그 상대성이다.
건축 분야에서는 재료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본다. 콘크리트나 철과 같이 건축물의 안전을 담당하는 재료는 얼마만큼의 외력에 견디는지, 그 외력에 어떻게 변형하다가 파괴에 이르는지를 주로 보지만, 스티로폼처럼 단열 성능을 바라보기도 하고, 나무처럼 재료 고유의 질감에 인간이 감응하는 관계를 보기도 한다.
재료는 힘을 받으면 변형하고 파괴된다. 이 현상을 우리는 조금 더 깊게 바라본다. 어느 범위 이내의 힘을 받으면 재료는 약간 변형하지만, 그 힘이 제거되면 원 상태로 돌아온다. 이 현상을 ‘탄성’이라 한다. 기능성 화장품에 탄성 즉, ‘elastic’이라는 이름을 종종 붙이는 이유다.
지난 대선 후 유시민 작가가 진보 성향의 지지자들에게 본인의 지지 성향과 맞지 않는 정권이 들어오더라도 ‘대한민국은 안 망한다’고 했던 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성숙한 대한민국은 탄성 범위가 넓어서, 설사 기대하지 않는 반대의 힘이 작용하더라도 그 변형은 회복할 수 있는 범위 이내일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 정권을 바라봤던 보수 성향의 시민이나 현 정권을 바라보는 진보 성향의 시민이 걱정하는 것은, 그 변형의 범위가 회복할 수 있는 탄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 현상을 우리는 ‘소성’이라고 한다. 재료가 힘을 받아 소성 단계에 이르면 힘을 제거해도 변형이 원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탄성을 잃은 피부에 웃음이나 찡그림에 의한 근육의 힘이 작용하면 주름이라는 영구변형이 생기는 원리이다. 그러니까 진보든 보수든 본인이 지지하지 않는 정권이나 다수당이 들어서 새로운 힘에 의해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가 발생하게 되고, 그 변화가 점차 증가해 돌이킬 수 없는 소성 상태에 이르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몇 년 후에 다시 정권이나 다수당을 되찾아도, 오늘까지 아버지라 부르던 역대 대통령이나 386 민주화 세대가 만들어 온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이 소성 단계를 넘어 붕괴로 향하지 않을까 분노하며 우려하는 것이다.
나는 재료의 성질 즉 물성을 연구한다. 그리고 시민이 만들어 가는 이 사회는 인성과 사회성의 영역이다. 지지하는 정치 성향이 있으나, 어머니도 이 글을 읽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들키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냐 개발도상국이냐 하는 것은 GDP와 같은 경제적 잣대만으로 볼 문제는 아니다. 부정한 정권과 정치인이 이 사회를 시민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탄성의 영역을 지나 소성의 영역까지 변형을 시키더라도, 재료라면 그 힘을 제거해도 원 상태로 돌이키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인간이 만든 우리 사회는 얼마든지 다시 탄성의 상태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시민의 힘이며 선진국의 기준이 아닐까. 그것이 치유라는, 물질이 아닌 생명체만이 가지는 능력이다.
이번 선거 결과를 통해 어떤 시민은 다시는 과거의 나쁜 사회로 돌아갈 수 없도록 큰 변화를 꿈꾸고, 또 다른 시민은 현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나쁜 변화를 저지하는 탄성의 회복력을 연대라는 이름으로 준비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성을 구성하는 인성이다. 물성이 아닌 것이다. 우리 세상의 모든 분자와 원자인 시민의 힘을 믿는다. 다 함께 사회를 변화시키고, 다 함께 회복시키면 되는 것이다. 자만하지 마시고 슬퍼하지 마시라.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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